▲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

사슴을 가리켜 사슴이라 하지 않고 말이라고 우겨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고 한다. 일부 보험사들이 약관에 정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여 많은 가입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약관을 잘못 만든 보험사들은 사슴을 말이라고 하듯 ‘보험금 지급의무 위반’을 모르쇠한 채 ‘소멸시효’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논란 중인 자살보험금 부 지급 사건이다. 

해당 보험사들은 ‘잘못 만든 보험약관도 효력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2016년 5월)을 무시한 채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급기야 소를 제기하여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법원 판결(2016년 9월)을 얻어 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멸시효를 당연시 해왔고, 언론에서도 사실 여부 확인 없이 ‘소멸시효가 경과된 계약’이라고 기사를 써 왔다.

그러나 문제는 소멸시효 주장이 당초부터 사실이 아님에도 이에 대하여 아무도 따지지 않았고, 심지어 감독당국 조차도 한 마디 언급 없이 고강도 행정제재만 예고하였다. 소멸시효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 치명적 오류와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째, 자살 후 2년이 지나 보험금을 청구하면 소멸시효가 지난 것이므로 보험금 지급 책임이 없다. 그러나 본 건은 자살 후 2년 안에 보험금을 청구한 것이므로 당초부터 소멸시효가 지난 것이 아니다. 사망보험금은 오직 한 번만 청구하므로 2년 안에 사망보험금을 청구한 것은 일반과 재해사망보험금(자살보험금)을 동시에 이미 청구한 것이므로 소멸시효와 무관한 것이고, 그래서 분쟁거리 조차 아니다. 선진국에는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논란 사례가 없다고 한다. 처음부터분쟁거리가 아니고 보험사가 당연 지급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둘째, 보험사의 자살보험금 부 지급으로 인해 2년 후 청구한 것을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 청구한 일반사망보험금과 후 청구한 자살보험금을 구분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보험사들이 자신을 부정한 것이다. 지구상 어느 나라도 사망보험금을 2번 청구하는 보험사는 없기 때문이다. 보험약관 어디에도 사망보험금을 일반/재해로 각각 구분하여 청구하란 내용은 전혀 없다.

셋째, 보험 가입 시 가입자에게 사망보험금을 각각 신청하라는 설명도 하지 않았고, 넷째, 보험사가 일반사망보험금 지급 시 자살보험금을 2년 안에 속히 청구해서 받으라는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다섯째, 보험사들이 약관을 잘못 만든 것이 화근이었으므로 원인을 제공한 보험사가 감수할 몫으로  보험사 귀책이다. 더구나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과 ‘약관 해석의 원칙’도 보험사들은 무시했다.

그러므로 소멸시효 주장은 처음부터 거짓이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내용들이 재판과정에서 실제로 얼마나 명확하게 따져졌는지 의문이다. 결국 소멸시효는 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보험금 지급 의무 위반’을 은폐하고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꼼수로 보는 것이다. 

11개 보험사들은 늦게라도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3개 보험사는 끝까지 버티며 금감원과 흥정하듯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지급해야 할 보험금은 안 주면서 적반하장으로 주주배임 ∙ 위로금 ∙ 자살예방기금 등을 운운하며 변명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부당하고 볼썽 사납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하여 미르·K스포츠재단에 119억원의 출연금을 냈는가? 

잘못은 바로 잡으라고 있는 것이니 절대 외면하면 안 된다. 금감원은 원점에서부터 재검토 하고 명백히 밝혀서 조속 마무리해야 하고, 보험사들은 자살보험금 지급을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안 된다.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는 보험사가 아니므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행여 문 닫지 않고 소멸시효를 계속 주장하려면 가입자들에게 사과하고 다섯 가지 사항을 당장 설득력 있게 해명해야 한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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