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백혈병 진실은?…오는 5월 최종 산재 결정만 남겨둬

“돈 걱정 없이 치료라도 시켰으면”…피해자 등 산재인정 촉구
무노조경영도 한 몫?…“의견 개진 못하고 죽기 살기로 일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과 LCD사업부에서 근무하던 일부 노동자들이 백혈병과 뇌종양 등을 선고 받고 이미 사망했거나 현재까지 투병중인 노동자와 그 유가족들이 집단 산업재해 신청을 한지 길게는 2년, 짧게는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그간 자체적인 판단이 어렵다며 산업안전보건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하고, 자문의사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산재결정을 지연시켜왔다. 이 가운데 근로복지공단은 오는 5월 중 최종 산재결정을 내리겠다고 통보, 이로써 투병 노동자와 유가족들의 막연했던 기다림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자식 팔아서 떼돈 벌자는 게 아니에요. 저도 제 자식이 이미 병신이 되서 예전처럼 돌아올 수 없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제가 살아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치료비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치료받게끔 해주고 싶어요. 열심히 일하다 얻은 병인데 산재인정도 안된다면….”

1995년부터 6년간 삼성 LCD 사업부에서 일하다가 2005년 소뇌부 뇌종양(상의세포종)이 발병해 이 후유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은 한혜경(32)씨의 어머니 이시녀(51)씨는 지난 21일 오전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삼성반도체 노동자 집단 백혈병 산업재해 인정 촉구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해 이 같이 말했다.

이씨에 따르면 혜경씨는 삼성 LCD 모듈과에서 6년간 납크림 및 아세톤 등 유기용제를 취급하는 공정을 수행했다. 입사 3년차가 되던 때 혜경씨는 무월경 상태가 지속되는 이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퇴사 몇 년 후 뇌종양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의 말대로라면 혜경씨의 뇌종양은 분명 퇴사 후 발병했다. 그렇다면 혜경씨의 병은 공정수행 과정에서 얻은 병으로 볼 수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 이씨는 “당시 내 딸을 진료한 의사들은 ‘암 깊이를 볼 때 이미 7~8년 정도 진행된 상황’이라고 말했다”며 “딸이 매일같이 다루고 있던 납이 발암물질인 줄도 몰랐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삼성’이니까 좋은 환경 속에서 일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딸아이 앞에서 한 번도 이런 암담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지만 지금 이만큼의 병세가 끝일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모르겠다”며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산재인정을 받아 우리 혜경이가 병원비 걱정 없이 치료를 받는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공정에서 ‘줄줄이’ 백혈병 발생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들은 혜경씨 가족뿐만이 아니다.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생산직에서 3년간 일하다 2년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당시 23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반도체에서 일어난 집단 백혈병 문제는 우리 유미만의 일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유미는 세척 등의 공정을 2인 1조로 맡았었는데 맨 처음 함께 조를 이뤘던 최모씨가 함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유산을 하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숙영(산재신청)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로부터 6~7개월 뒤 우리 유미에게 백혈병이 발병됐고 1년 뒤인 2006년 같은 공정에서 일하던 이숙영씨마저 백혈병을 얻어 그해 사망했다. 특정 공정에서 일한 사람들 대부분이 병을 얻은 꼴이다.”

이처럼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집단 백혈병’ 사건 대부분은 특정 생산라인, 화학물질에 반도체원판을 담궜다 빼는 세척 등의 공정을 수행하는 1~3라인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지난 3월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발표한 삼성반도체 역학조사결과에는 이 같은 특징이 반영되지 않았다. 반도체노동자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등 시민단체들이 이 조사결과를 두고 “백혈병이 얼마나 발병했는지에 대해 조사됐을 뿐 어느 공정에서 발병했는지, 해당 공정의 특성은 무시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다.

안전교육도 형식에 그치기 일쑤

기흥사업장에서 설비엔지니어로 일하다 2004년 백혈병이 발병해 2005년 사망한 고 황민웅(당시 31세)씨의 부인 정애정씨 역시 해당 사업장에서 생산직 직원으로 근무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정씨는 “작업라인에 들어가기 위해선 방진복을 입어야하는데 이 자체도 외부 유해물질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제품보호를 위해 입는 것”이라며 “창문조차 없는 완전 통제된 공간 속에서 지독한 화학약품 냄새와 엄청난 압력, 윙윙거리는 소음 등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한 두 시간만 지나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고 삼성반도체 공장 내 작업환경 실태를 고발했다.

그는 이어 “노동조합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여직원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자기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죽기 살기로 일을 해야 한다”며 “또 안전교육도 형식에 그치거나 교육을 했다고 입을 맞추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들 생산직 여직원들은 자신들이 어떤 물질을 다루고 있으며, 이 물질이 인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게 정씨의 주장이다.

삼성 “결과가 나와야 작업환경을 바꾸던지…”

반도체 산업이 처음으로 시작됐던 미국 실리콘밸리의 반도체공장은 ‘꿈의 공장’ ‘완벽한 공장’이라는 칭송을 받아왔다. 그런데 70년대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각종 암에 걸린 사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반도체 공장에 대한 환상이 깨지게 됐다.

80년대 IBM사의 경우, 재료분석파트에서 일하던 연구원 12명 중 6명이 암에 걸리고 2명은 골격계암, 1명이 뇌종양으로 사망한 일이 알려지면서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반도체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이 조직된 2007년 11월 이후 2009년 3월 현재까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제보된 사례는 20여건으로 이들은 현재 산재신청을 했거나 준비 중에 있다. 삼성반도체 외에도 하이닉스 반도체 등 반도체공장에서의 백혈병 발병 사례는 최근에도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삼성반도체 관계자는 “역학조사결과 근로자들의 백혈병과 공장 작업환경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산재판정 결과가 산업재해인 것으로 나온다면 그때 작업환경을 바꾸는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3월 한국산업안전보건이 삼성반도체의 집단 백혈병이 직업병과 관련이 적다는 발표를 낸 직후 노동부는 향후 2019년까지 삼성반도체업체 역학조사의 후속조치로 삼성전자, 하이닉스, 엠코테크놀로지 등 림프조혈기계암이 다수 발생한 반도체업체에 대한 건강관리 강화방안을 시행키로 했다고 지난 1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는 삼성반도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한 전체 반도체산업에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왈가왈부 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