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구급의 건설사에서 나락으로 직행한 사연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 공사로 불리며 사막을 기름진 땅으로 바꾼 ‘리비아 대수로 공사. 이 중심에는 동아그룹과 최원석 전 회장이 있었다. 하지만 몰락은 빨리 찾아왔다. 동아건설이 시공을 맡은 성수대교가 ’한국 최악의 교량사고‘라는 오명을 남기며 처참히 무너져 내리면서 그룹도 같이 몰락했다. 지금은 최 전 회장과 그 일가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을 뿐, 그룹은 공중분해 돼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동아그룹은 고 최준문 창업주가 1945년 8월 대전에서 설립한 충남토전사를 모체로 한다. 충남토전사는 1953년 3월 대전 지방의 청라 저수지와 남포간척지, 대천간척지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통해 기반을 다졌다. 충남토전사는 1957년 동아건설산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동아건설은 사명을 변경한 그해에 본사를 대전에서 서울 중구 서소문동으로 이전했다. 1960년대 들어 동진간 간척 공사와 왕십리발전소 공사,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입지를 굳혀 나갔다. 특히 제1차 경제 다목적 토목 사업이었던 동전강 간척 공사는 동아건설이 충청도를 대표하는 지방 기업에서 전국을 무대로 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지렛대 역할을 했다.

◆ 한국경제의 징검다리

토목업을 주로 하던 동아건설이 사세를 확장해 그룹으로서의 골격을 형성하게 된 때는 1968년이다. 당시 동아건설은 국영기업인 대한통운을 인수했다. 정부는 대한통을 민영화 하면서 동아건설에 경영권을 넘겼다.

동아건설은 대한통운을 토대로 건설·운송 체제로 외형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만성 적자와 경영부실의 늪에 빠져있던 대한통운은 동아건설에 인수된 지 3년 6개월 만에 정상화에 성공했다. 이는 한국 경제 발전에 든든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1973년 동아그룹은 투자 회사인 동아종합상사를 건립해 무역업에 진출하고 기업을 공개,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지사를 설치한 후 리야드와 지다, 뉴욕, 도쿄, 런던 등지에도 진출했다.

이에 앞선 1966년부터 동아콘크리트 사장으로 경영 수업을 받던 최 창업주의 장남 원석씨는 1977년 건강 악화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아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최 전 회장은 1980년대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사로 평가받던 리비아 대수로공사를 수주했다.

대한통운 인수 뒤 그룹으로 확장…‘승승장구’
녹색기적 대수로 공사…최고 건설사로 ‘우뚝’

리비아는 물보다 기름이 많은 나라로 전 국토의 90%가 사막 등 불모지로 이뤄져 있다. 일 년에 비가 한두 번 올까 말까하는 이나라의 유일한 희망은 남부 사막지대 아래서 발견된 엄청난 규모의 지하수뿐이었다. 지하수를 수도 트리폴리나 벵가지까지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생활용수는 물론 농업·공업용수 문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대수로 계획에서 유일한 문제는 기술력이었는데 카다피는 ‘녹색혁명’을 발표해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추진키로 했다. 공사 규모는 리비아 북부 뱅가지와 시르테르까지 총 1874㎞였다.

최 회장은 1983년 39억달러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따내면서 카다피 리비아 원수와 인연을 맺은 뒤 공사 수행능력을 인정받아 1990년 62억달러 규모의 2단계 공사, 1998년 51억달러 규모의 3단계 공사까지 연이어 따냈다. 동아건설은 지름 4m의 수도관으로 650㎞를 달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물을 공급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당시 한 언론은 성공의 순간을 “1996년 9월 1일 오후 4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카다피 리비아 국가 지도자가 수도꼭지를 틀자 콸콸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며 “맑고 시원한 물이었다. 트리폴리 남쪽 650㎞ 떨어진 자발 하소나의 지하 480m에서 퍼 올린 암반수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날 통수식에 참석한 카다피 등 세계 30여개국 국가 원수들은 일제히 환호했다”며 “통신장교였던 카다피가 1969년 ‘녹색혁명’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쿠데타로 집권한지 27년 만에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는 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카다피는 곁에 서있던 최 전 회장의 손을 번쩍 들며 “대수로 공사를 차질 없이 시공해준 한국 기업에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동아건설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 이후 현대건설과 함께 국내 최고 건설회사 반열에 올랐고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공사라는 찬사를 받음과 동시에 세계 최대 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독재자’ 카다피와의 인연

만약 동아그룹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리비아와의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동아건설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중동이라는 유력한 성장 시장에서 확고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동아그룹 해체 후인 2010년 간첩 사건으로 리비아와 외교문제가 불거졌을 때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행하면서 카다피와 막역한 관계를 맺었던 최 회장을 외교 사절로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정도이니 말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그룹은 1997년 12월 기준 동아건설과 대한통운, 동아생명, 동아증권, 동아엔지니어링, 공영토건 등 22개 계열사를 둔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 자리를 차지했다. 주력기업인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의 매출은 각각 3조원, 1조1500억원으로 업계 31위와 75위를 꿰찼다.

하지만 해외에서 잘 나간 동아그룹은 국내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국내 다른 그룹 계열 건설사들은 아파트 건축과 그룹 자체 공사로 상당한 일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해외 공사에 주력했던 동아건설은 국내 재개발과 재건축 공사를 따내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신축과 달리 이주비가 들어가는 재개발과 재건축 공사를 위해 동아건설은 제2금융권으로부터 막대한 단기자금을 차입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망한 기업이 망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동아그룹은 14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와 함께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한순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성수대교 붕괴는 1994년 10월 21일 교각 10번과 11번 사이 상판 120m 중 48m가 갑자기 한강으로 내려앉으면서 그 위를 달리던 버스 등 차량 6대가 한강에 추락한 사고다. 준공된 지 불과 15년도 안 된 성수대교의 붕괴는 날림 공사가 원인이었다. 실제 조사 결과 발주처 입찰예정 가격은 116억원이었지만 동아건설은 77억2000만원에 공사를 낙찰 받았다. 덤핑 수주는 부실시공으로 이어졌다. 예정가의 절반 수준에 그친 낙찰가로는 값싼 저급자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규정보다 적게 투입됐다.

1998년 초 최 회장은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고 경영권과 700억원대의 재산을 내놓고 경영에서 물러났고, 그해 8월 동아그룹은 국내 최초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최종 확정됐다. 이 때 조건은 동아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매각해 경영을 정상화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아그룹은 2000년 11월 법정관리 대상기업으로 결정돼 퇴출됐다가 2001년 5월 파산선고를 받으면서 55년 역사의 건설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룹 해체 후 최 전 회장은 2004년 분식회계와 배임, 불법 사기대출 등 혐의로 구속됐다. 2008년 특별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3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끊임없는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 등 ‘불량총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 전 회장과 그 일가는 악행을 이어갔다. 먼저 최 전 회장은 학교법인 공산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도 회사 부도 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줄곧 세금을 체납해왔다.

2007년에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방송예술대학의 학내 기업이 만드는 <굿바이 테러리스트>라는 영화에서 총감독을 맡아 영화계에 입문하기도 했다.

덤핑수주·날림시공·원가절감이 만든 ‘불협화음’
망해도 누리는 ‘부귀영화’…계속되는 검찰수사

최 전 회장은 국세청의 눈을 피해 2011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박혼골프클럽의 회원권환급금 25만달러를 차남에게 양도하기도 했다. 또 공산학원의 공금 10억원을 빼돌린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검찰은 이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최 전 회장을 체납처분 면탈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건설 대표이사와 예음 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낸 최 전 회장의 동생 원영씨는 1997년 10월부터 1998년 3월까지 경영학원 이사장으로 있었다. 경원대와 경원전문대 학생들이 낸 등록금 201억원을 자신이 운영하던 예음그룹 산하 계열사의 부도를 막는데 사용한 혐의로 2012년 구속됐다.

◆ 콩가루 집안?

이에 앞서 원영씨는 1993년 11월에 자신이 운영하던 예음문화재단 명의의 부동산을 성남교육청에 매각하고 받은 99억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았다. 이와 함께 경원전문대학의 강의동 등에 대한 공사를 자신이 운영하는 동아종합환경에 발주하도록 하고 선급금 명목으로 28억원을 지급, 법인에 손해를 입힌 혐의도 있다.

최 전 회장에게는 공식적으로 혼외 자식을 비롯해 전처들에게서 난 4남2녀가 있다. 최 전 회장이 20살일 때 한 여배우 사이에서 낳은 딸 선희씨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형 고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으 차남 재찬씨와 결혼했다. 이들은 2012년 3월 아들들과 함께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1000억원대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내 주목 받기도 했다.

영화배우 전도연씨와 2000년대 초 염문설이 불거졌던 장남 우진씨는 최 전 회장의 첫 부인인 김혜정씨 소생이다. 김 씨는 195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은 대표적인 배우로 최 전 회장과 1962년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국 파경했다. 우진씨는 옛 ‘동아맨’들이 포진하고 있는 W엔지니어링에서 전략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박에도 최 전회장의 차남 은혁씨는 2003년 6월 액상원두커피와 차, 인스턴트식품 등을 취급하는 쟈댕 윤영노 회장의 딸과 혼인했지만 2013년 7월 사망했고, 삼남 용혁씨와 사남 재혁씨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