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일해청문회 판박이…‘모르쇠’ 일관 ‘맹탕 청문회’

▲ 6일 국회 재벌청문회에 나서 생각에 잠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이완재 기자]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촉발한 재벌청문회는 예상대로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핵심증인 쏙 빠진 ‘맹탕 청문회’ ‘모르쇠 청문회’ ‘그들만의 청문회’라는 오명만 남겼다.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개인청문회로 끝났다는 비아냥마저 들린다. 이재용으로 시작, 이재용으로 끝났다는 얘기다.

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재벌 9인이 국민 앞에 섰다. 이재용, 정몽구, 최태원, 손경식, 구본무, 신동빈 등이 그들이다. 이들 총수들은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외에도 회사 합병, 면세점 선정, 사면 청탁 등 복수의 정경유착 의혹을 추궁 받았다.

이날 청문회는 28년 전인 1988년 ‘일해(日海) 청문회’의 복사판이었다. 당시 청문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를 딴 ‘일해재단’이 대기업들로부터 ‘아웅산 테러’ 희생자 유가족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모금한 것의 강제성과 대가성 여부를 집중 캐물었다.

이미 고인이 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해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류찬우 전 풍산금속 회장, 장치혁 전 고려합섬 회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이준용 전 대림산업 부회장 등이 증언대에 섰다.

다시 28년이 지난 지금, 그때나 지금이나 청문회의 본질은 ‘정경유착’을 벗지 못했다. 청문회 수준은 오히려 더 퇴보했다는 평가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88년 청문회 때는 고 정주영 회장 등 핵심증인들이 반성을 시인했지만, 28년이 지난 지금의 총수들은 똑같은 성격의 죄에 반성은커녕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댓가성 없는 지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고 혹평했다.

전두환 정권 이후 정권이 7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정경유착의 폐해는 여전하고, 기업총수들의 모럴헤저드나 의식수준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적나라하게 노출했다.

정부의 압박 아래 대기업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수십억∼수백억원을 출연한 행태도 판박이다.

이번 재벌청문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인기(?)는 남달랐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거액 출연 배경과 삼성물산과 제일합병의 합병과정에서의 의혹 등 쟁점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당연히 이 부회장은 특조위원으로부터 가장 많은 질문을 받고 답변했다. 출석한 전체 총수들 가운데 가장 많이 TV화면에 노출됐다. 자신이 삼성의 임원에 오른 이래 가장 많은 전파를 탄 셈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뇌물공여죄를 피해가기 위해 사전 철저히 준비된 질문에 대한 답은 어김없이 “잘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였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해체, 전경련 탈퇴, 경영권 이양 가능성 등 깜짝발언은 그나마 지켜보는 국민에 대한 작은 팬서비스 같은 느낌이었다.

귀공자풍 곱상한 얼굴로 간간이 의원들의 날선 질문에 얼굴이 상기되는 등 쩔쩔 매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것마저도 혹자는 준비된 어눌한 말투와 태도로 교묘히 핵심의혹들을 피해가려는 고도의 전술로 해석했다. 최대 기업 삼성에 대한 국민적 불신의 골의 반증에 다름 아니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청문회를 통해 정경유착의 연결고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무용론이 급부상한 것이다. 이날 삼성, 현대차, SK, LG 총수는 잇달아 전경련 탈퇴를 선언했다.

굳이 대통령제의 폐해로만 치부하기엔 이 땅의 정경유착의 검은 역사는 너무 깊고 음침하다. 기업들 스스로 그 오랜 장막을 걷고 스스로 투명해지려는 절치부심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건전한 시장자본주의로의 환골탈퇴의 길이다. 그것이 기업이 그동안 잃어버린 국민들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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