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픽사베이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

1988년 11월에 열린 ‘5공 비리 청문회’ 전두환 정권 일해재단 모금과 관련, 증인으로 불려 나온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했던 말이다.

순간 청문회장 내는 술렁였다. 재벌 총수의 양심선언에 추측은 사실로 확인됐다. 당시 재계 서열 1위였던 현대그룹의 수장도 권력의 압박에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비애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30여년 만에 다시 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현대를 제치고 한국 최대 재벌이 된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은 물론, 최태원(SK), 구본무(LG), 신동빈(롯데), 허창수(GS), 김승연(한화), 조양호(한진), 손경식(CJ) 등 국내 주요 재계 수장들이 총 출동하는 ‘블록버스터’ 급 청문회다. 좀처럼 언론에 얼굴을 비추기 싫어하는 재벌 총수들로서는 곤혹스런 하루가 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상황이다. 총수들 중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더욱이 그 고양이는 이미 국민들로부터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 “닥치고 당장하야”하라는 촛불민심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수명 다 한 대통령이다. 이번에야 말로 재벌 총수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할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해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하는 양심을 보여줄 때다. 정녕 어느 재벌총수라도 과거 정주영 회장이 했던 것처럼 대의로써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해주길 국민은 바란다. 그리한다면 본인의 명예회복은 물론 재벌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바뀔 것이다.

당장 처벌을 피하기 위한 꼼수는 파멸을 자초할 뿐이다. 이제 사상 초유의 ‘헌정 농단 사태’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여는 계기로 승화돼야 한다. 부디 이번 재벌 청문회가 그 시작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과거 어느 때보다 양심선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충족됐다. 의식 있는 총수가 한 명이라도 나와야 한다.

이들이 봐야 할 것은 권력이 아닌 국민이다. 자신들이 증인석에 서게 된 이유가 국민들의 ‘촛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다시 깨어난 ‘대한민국 시민의식’의 힘이다. 이번 집회를 통해 국민의 의식수준이 정치권, 재계, 검찰, 언론보다 상위임이 확인됐다. 이제 이 땅에 ‘진보를 종북으로 매도하는 정치인’, ‘권력과 결탁해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재벌’, ‘권력에 기생하는 언론’은 사라져야 한다. 사상 초유의 헌정 농단 사태를 전화위복 삼아 대한민국 국격을 높이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로 삼아야한다. 수십년을 묵묵히 인내해온 국민의 마지막 명령이다.

<한병인 파이낸셜투데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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