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 마음
[파이낸셜투데이=부광우 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사재출연 약속’이 실종 된지 어느덧 8년이 지났다. ‘삼성 특검’에서 수조원에 달하는 차명재산이 드러난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하며 달하는 개인 돈을 ‘좋은 일’에 쓰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일 뿐이다.
여기에 이 회장이 병고에 쓰러지면서 이 약속은 아예 종적을 감추는 형국이다. 고령인 이 회장이 병석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병상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낮아지고, 약속이행 가능성도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결국 이 회장의 약속은 대국민 ‘기만극’으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어느덧 8년
이 회장의 사재출연 약속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비자금 특검’ 결과 4조5000억원에 달하는 차명재산이 드러나면서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에 이 회장은 같은해 4월 22일 ‘대국민 사과 및 퇴진 성명’을 내고, 차명재산에 대해 누락된 세금을 납부한 뒤 남는 돈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밝혔다. 또 차명재산 실명 전환과 사재 출연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삼성이 밝힌 성명에는 “특검에서 조세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신탁한 것으로 이번에 이 회장 실명으로 전환한다”며 “이 회장은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후 남는 돈을 회장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자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2008년 당시 삼성 특검이 확인한 이 회장의 차명재산은 총 4조5368억원이었고, 이 중 4조988억원은 삼성그룹 계열사 차명주식이었다. 삼성생명 차명 주식이 2조3119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삼성전자 차명 주식이 1조4584억원으로 두 회사 차명 주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밖에 ▲삼성화재 951억원 ▲삼성전기 683억원 ▲삼성증권 627억원 ▲삼성물산 456억원 ▲삼성SDI 321억원 ▲에스원 89억원 등의 차명주식을 보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차명주식 외에 이 회장은 예금과 채권, 수표 등의 형태로 4357억원을, 상품권 52억원 어치도 보유했다. 삼성특검 수사 당시 공개돼 화제가 됐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 미술품도 307억원 어치 소장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특별 사면’을 받은 뒤 사재 출연 약속을 일체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은 2009년 5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4개월 뒤 특별사면을 받고 이듬해 경영에 복귀했다.
아직도 지켜지지 않은 2008년의 공언그 사이 챙긴 배당 9000억…이재용은?
반대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비자금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과정에서 약속했던 사재출연을 이를 모두 이행해 대비를 이뤘다.
정 회장은 2013년 11월 이노션 지분 10%를 스틱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해당 지분 매각 완료로 정 회장은 2006년 검찰의 현대차 불법 비자금 수사가 진행되던 당시에 했던 “2013년까지 8400억원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확실히 매듭지었다.
정 회장은 2007~2011년 4차례에 걸쳐 현대글로비스의 지분(439만6900주·6500억원 상당)을 내놓은 데 이어, 2013년 7월 이노션 지분 전량(36만주·20%)을 정몽구재단에 출연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증여세 문제가 발생, 이노션 지분 중 10%를 매각하게 된 것이다.
반면 이 회장은 경영에 복귀 한 뒤 여전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배당금은 9000억원 가까이 챙겼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의 주식을 보유 중이다.
재벌닷컴 등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이 회장이 이들 계열사에서 받은 배당금은 ▲2009회계연도 874억원 ▲2010년 1341억원 ▲2011년 1091억원 ▲2012년 1034억원 ▲2013년 1079억원 ▲2014년 1758억원 ▲2015년 1772억원 등 8949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올해 7월 결정된 삼성전자 중간배당금 49억원을 더하면 모두 8998억원이다.
이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아직까지 의식불명인 상황에서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 상태다.
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와병 중인 이 회장 스스로가 이 문제를 거론할 상황도 아니고, 병고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금, 삼성그룹 측이 이를 들먹이기도 힘들다.
이같은 상황에서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가 열리면서 이 부회장이 부친의 사재출연 약속에 해법을 제시할 가능성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 역시 실현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의 와병 이후 지금까지 이 문제에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책임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경영승계에서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답을 내놨어야 했다.
사재출연 규모가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점은 이 부회장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이 사재출연금액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시민단체 등에서는 1조원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대물림되는 짐
후계 승계과정에서 지배력 강화와 상속세 부담에 당면하고 있는 이 부회장 입장에서 이처럼 천문학적 액수의 사재출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 혹을 붙이는 꼴이다.
하지만 삼성그룹이 결국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이 회장 본인은 물론 회사의 도덕성은 계속해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사재출연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결론나면 이 회장과 삼성그룹은 ‘거짓말 한 기업’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애써 일군 ‘글로벌 삼성’이란 공적에도,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