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 마음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부광우 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사재출연 약속’이 실종 된지 어느덧 8년이 지났다. ‘삼성 특검’에서 수조원에 달하는 차명재산이 드러난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하며 달하는 개인 돈을 ‘좋은 일’에 쓰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일 뿐이다.

여기에 이 회장이 병고에 쓰러지면서 이 약속은 아예 종적을 감추는 형국이다. 고령인 이 회장이 병석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병상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낮아지고, 약속이행 가능성도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결국 이 회장의 약속은 대국민 ‘기만극’으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어느덧 8년

이 회장의 사재출연 약속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비자금 특검’ 결과 4조5000억원에 달하는 차명재산이 드러나면서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에 이 회장은 같은해 4월 22일 ‘대국민 사과 및 퇴진 성명’을 내고, 차명재산에 대해 누락된 세금을 납부한 뒤 남는 돈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밝혔다. 또 차명재산 실명 전환과 사재 출연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삼성이 밝힌 성명에는 “특검에서 조세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신탁한 것으로 이번에 이 회장 실명으로 전환한다”며 “이 회장은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후 남는 돈을 회장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자고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2008년 당시 삼성 특검이 확인한 이 회장의 차명재산은 총 4조5368억원이었고, 이 중 4조988억원은 삼성그룹 계열사 차명주식이었다. 삼성생명 차명 주식이 2조3119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삼성전자 차명 주식이 1조4584억원으로 두 회사 차명 주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밖에 ▲삼성화재 951억원 ▲삼성전기 683억원 ▲삼성증권 627억원 ▲삼성물산 456억원 ▲삼성SDI 321억원 ▲에스원 89억원 등의 차명주식을 보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차명주식 외에 이 회장은 예금과 채권, 수표 등의 형태로 4357억원을, 상품권 52억원 어치도 보유했다. 삼성특검 수사 당시 공개돼 화제가 됐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 미술품도 307억원 어치 소장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특별 사면’을 받은 뒤 사재 출연 약속을 일체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은 2009년 5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4개월 뒤 특별사면을 받고 이듬해 경영에 복귀했다.

아직도 지켜지지 않은 2008년의 공언
그 사이 챙긴 배당 9000억…이재용은?

반대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비자금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과정에서 약속했던 사재출연을 이를 모두 이행해 대비를 이뤘다.

정 회장은 2013년 11월 이노션 지분 10%를 스틱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해당 지분 매각 완료로 정 회장은 2006년 검찰의 현대차 불법 비자금 수사가 진행되던 당시에 했던 “2013년까지 8400억원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확실히 매듭지었다.

정 회장은 2007~2011년 4차례에 걸쳐 현대글로비스의 지분(439만6900주·6500억원 상당)을 내놓은 데 이어, 2013년 7월 이노션 지분 전량(36만주·20%)을 정몽구재단에 출연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증여세 문제가 발생, 이노션 지분 중 10%를 매각하게 된 것이다.

반면 이 회장은 경영에 복귀 한 뒤 여전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배당금은 9000억원 가까이 챙겼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의 주식을 보유 중이다.

재벌닷컴 등의 집계 결과에 따르면 이 회장이 이들 계열사에서 받은 배당금은 ▲2009회계연도 874억원 ▲2010년 1341억원 ▲2011년 1091억원 ▲2012년 1034억원 ▲2013년 1079억원 ▲2014년 1758억원 ▲2015년 1772억원 등 8949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올해 7월 결정된 삼성전자 중간배당금 49억원을 더하면 모두 8998억원이다.

이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아직까지 의식불명인 상황에서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 상태다.

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와병 중인 이 회장 스스로가 이 문제를 거론할 상황도 아니고, 병고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금, 삼성그룹 측이 이를 들먹이기도 힘들다.

이같은 상황에서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가 열리면서 이 부회장이 부친의 사재출연 약속에 해법을 제시할 가능성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 역시 실현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의 와병 이후 지금까지 이 문제에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책임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경영승계에서의 잡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답을 내놨어야 했다.

사재출연 규모가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점은 이 부회장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이 사재출연금액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시민단체 등에서는 1조원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대물림되는 짐

후계 승계과정에서 지배력 강화와 상속세 부담에 당면하고 있는 이 부회장 입장에서 이처럼 천문학적 액수의 사재출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 혹을 붙이는 꼴이다.

하지만 삼성그룹이 결국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이 회장 본인은 물론 회사의 도덕성은 계속해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사재출연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결론나면 이 회장과 삼성그룹은 ‘거짓말 한 기업’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애써 일군 ‘글로벌 삼성’이란 공적에도,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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