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이 무너뜨린 섬유공룡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속옷 브랜드 트라이와 아동복 앙떼떼 등으로 의류시장을 풍미했던 쌍방울그룹. 기세를 몰아 삐삐와 레저사업 등 사업 다각화를 통해 사세를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쌍방울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리한 확장으로 재무상태가 불량해졌고,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후 자구 노력을 통해 명성을 조금씩 되찾고 있는 쌍방울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북을 대표하는 향토기업 쌍방울은 창업주 이봉녕 회장의 인생과 궤를 같이한다. 1924년 2월 5일 이영옥씨와 최병옥씨의 5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이 전 회장은 23세가 되던 47년 부인인 김복래씨와 결혼했다.

해방 후 이 전 회장은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1949년 농촌생활을 포기하고 전주를 거쳐 처남이 사는 익산으로 이사했다. 이 전 회장의 처남은 무명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전 회장은 그를 따라다니면서 장삿일을 배워 나갔다. 장날에 맞춰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았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그의 ‘무명베 장사꾼’ 역사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장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 전 회장은 전쟁 중 양말장사를 시작했고 쌍방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 떡잎부터 다르네

이 전 회장은 시골 아낙네들이 장날에 가져오는 양말을 구입해 노점을 벌이는 형식으로 장사를 했다. 생산자들이 장날에 팔아달라고 맡기면 이 물건들을 판매해 수수료 명목으로 이익을 남기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결국 이 전회장의 노점상은 양말 도매상으로 커졌고, 양말을 팔기 시작한지 3년만인 1954년 3월 이리 파출소 앞에 10여평의 점포를 얻어 동생 창녕과 함께 쌍방울의 전신격인 형제상회를 개업했다.

이 전 회장의 형제상회는 개업 1년만인 1955년 10평에서 30평 규모로 커졌다. 취급물량이 많아지면서 양말뿐만 아니라 다양한 잡화도 판매하는 종합 잡화상으로 성장한 것이다.

생활의류가 부족했던 당시 형제상회의 물건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형제상회는 내의류 도매상으로 성장해 종업원 18명을 갖춘 기업으로 거듭났다. 1958년에는 대전 이남의 충청권과 호남지역 최대의 민소매런닝 도매상으로 이름을 알렸다.

양말에서 내의 생산까지…우여곡절 성장기
쌍방울의 태동…장인정신으로 일군 상품성

이처럼 규모가 커지면서 형제상회는 소규모 민소매런닝 제조업체에 자본을 대주고 생산품을 납품받기도 했다. 소형 제조업체들은 형제상회의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대형업체들로 절반을 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형업체들은 횡포를 부리면서 형제상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판매 물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곤혹을 치루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이 전 회장은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하고 제조 사업 구상에 들어갔다.

이 전 회장은 1958년 속옷 업체들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1107개에서 726개로 줄어드는 상황을 지켜보다 1962년 9월 동이리역 부근에 28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출범했다. 공장은 중고 편직기 7개와 작두 4대, 핸드나이프 1대, 염색시설을 갖췄고 종업원 50명과 함께 출발했다. 동생인 창녕씨는 공장장을 맡았다.

삼남 메리야스는 첫 제품으로 ‘삼남표’라는 상표를 부착한 민소매런닝을 출시했다. 하지만 호남지역에서 이름을 알리는 데에만 1년이 넘게 걸렸고, 이 과정에서 삼남메리야스는 자금압박 등 어려움을 겪었다. 기업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일관성 있는 운영체제가 절실했다.

이 전 회장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1963년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사로 변경했다. 형제를 의미하는 쌍과 봉녕, 창녕의 끝자인 녕을 조합한 것이다. 훗날 쌍방울이 1963년 3월을 그룹의 실질적인 출발 기점으로 잡은 것도 이런 연유다.

이 전 회장은 ‘삼남표’라는 상표가 전국 소비자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기 어렵다고 판단, 상표 변경을 모색한다. 그래서 나온 상표가 ‘쌍방울’이다. 쌍방울은 사람들이 항상 몸에 밀착하고 애용해야 할 속옷류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정감을 느끼게 했고, 또 상호인 쌍녕의 한글식 표기여서 거부감도 없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64년 10월부터 새로운 상표 쌍방울을 출시했다. 다만 충청과 호남지역 출하제품에 한해서는 삼남표를 당분간 사용하기로 했다.

쌍녕이 전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 유수의 상표 벽을 허물어뜨려야 했다.

이 전회장이 꺼낸 첫 카드는 서울판매부 설치였다. 서울판매부의 성공은 쌍녕섬유가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60년대 후반 쌍방울은 전국적 유통망 확보에 성공했다.

전국적으로 판매량이 급증하자 쌍녕섬유는 1968년들어 종전 판매과를 판매부로 승격시키고, 인력도 30여명으로 대폭 증원해 전국 판매망을 포괄했다.

당시 섬유의 주원료인 면사의 국내 공급물량이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해 섬유업계가 원료확보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면사(綿絲)파동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쌍녕섬유는 이 전 회장이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니며 원사확보에 주력했고, 제품 판매 호조가 이어지면서 회사는 급신장했다.

◆품질이 최우선

1968년에는 우리나라 섬유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품질관리부를 운영했다. 염색기술자를 스카웃해 염색기술을 보강하는 한편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했다.

제품도 다양화해 1966년 ‘파이렌’이라는 신사용 내의, 1967년 ‘뉴티’라는 티셔츠를 개발해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는 등 외 의류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도 했다.

이같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쌍녕섬유공업사는 1972년 6월7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자본금을 3200만원으로 총3만2000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대표이사는 이 전 회장이었다.

공장 규모가 커지자 1973년 8월부터는 매월 50∼60명의 종업원을 공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몇 개월 후 쌍녕의 종업원은 거의 두 배 규모로 늘어났다. 동이리공장은 쌍녕에서 분리 독립, 서안섬유주식회사가 됐다. 당시 국내 경제와 섬유업계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내실을 잘 다진 쌍녕은 오히려 성장을 거듭했다.

실제 1974년 쌍녕의 내수부문 매출액은 5억 2000만원에 불과했지만, 1975년에는 29억 8900만원으로 무려 6배가 신장했다. 이어 1976년에는 전년대비 100% 성장한 56억1200만원에 달했고, 1977년에는 112억300만원으로 처음 내수부문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1976년 말에는 증설과 보수작업을 마무리하고, 이 과정에서 신형 기계를 도입했다. 1977년에 설치한 자동선염기와 신형 표백기 설치로 염공시설의 자동화를 이뤘다.

또 1977년에는 1일 2500톤의 폐수를 처리할 수 있는 현대식 폐수처리 시설을 준공, 생활환경 개선과 수질오염 방지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쌍방울의 급신장 아래 쌍녕방적 설립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이 전 회장이 갑작스럽게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만다. 위기의식을 느낀 쌍녕의 임원들은 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장남 이의철을 대표이사로 추대하자는 뜻을 제안했고, 1979년 6월 7일 이 전 회장은 대표이사 회장에 추대되고, 이의철 기획실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전 사장은 1979년 6월 취임 후 많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나갔다. 그는 취임 2개월 후인 1979년 8월1일 동종업계 최초로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 서울사무소와 이리 본사를 온라인으로 연결했다. 이 전 사장은 이어 본사 서울 이전 작업을 추진, 그해 12월1일부로 이리에 있던 본점 소재지를 서울로 이전하고, 생산 관련 부서를 제외한 관리부서 전체가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용 패션내의 쟈키(JOCKEY)를 출시, 그동안 백색내의 일색이던 국내 내의시장을 뒤흔들었다. 1984년 7월 미국 쟈키사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 뒤 1986년 남성용, 1988년 여성용(JOCKEY FOR HER) 패션내의를 내놓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1987년 11월 try가 탄생했다. 중가품인 쌍방울과 고가품인 JOCKEY 사이의 중상가 패션내의 try는 출시 초기 고유 브랜드 이미지가 부족해 고전했지만, 제품을 다양화(1990년 190개 품목)하고 광고에 주력하며 소비자 관심을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사업 다각화 시작…엄습하는 어두운 그림자
과거영광 되찾나…부도 후 칠전팔기로 도전

◆ 찬란한 과거는 안녕

하지만 쌍방울의 찬란한 시절은 여기까지였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 원흉이었다. 무주리조트 개발을 수행한 쌍방울개발을 비롯해 ▲ 쌍방울상사 ▲쌍방울다반 ▲쌍방울룩 ▲쌍방울베베 ▲태영모방 ▲화성실업 ▲덕원관광개발 ▲쌍방울레이더스 등 거느리고 있는 회사만 9개에 달했다.

쌍방울은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가 확정된 후 쌍방울개발은 무주리조트 사업 고삐를 당겼지만, 자금난에 봉착했다.

쌍방울그룹 부도는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추진한 관광레저사업, 건설업 진출 등이 한 원인이었다. 쌍방울이 가장 잘하는 분야는 내의 관련업이었지만, 이의철 부회장은 부친 이봉녕 회장을 비롯한 대다수 선배 경영진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레저관광업에 진출했다.

쌍방울은 1996년 연매출액 3600억원을 넘기며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쌍방울은 쌍방울개발(무주리조트)에 대한 8000억원이 넘는 보증채무를 지고 있었고, 이는 1997년 1차 부도 후 쌍방울이 추진한 법정관리 탈피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종합패션기업이었던 쌍방울은 법정관리 이후 모든 사업을 아웃소싱 또는 청산 매각했다. 2000년에는 주력사업인 트라이를 중심으로 한 내의사업과 진 캐주얼 리(LEE)만 보유하게 됐다. 이후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다 2004년 쌍방울은 대한전선 계열사로 편입됐다. 쌍방울은 논현동 본사 사옥을 505억원에 매각하는 등 치열한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과거만큼은 아니더라도 정상화를 꽤했다.

지난해 쌍방울의 영업이익은 전년대비 276.3% 증가한 10억원, 매출액 1426억원을 기록했다. 당기순손실은 5억원으로 전년대비 적자 규모를 58.6%나 줄였다. 오는 2020년에는 매출 5000억원, 영업이익 500억원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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