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 명절인 추석을 앞둔 지난 8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관계자들이 기업과 가계의 자금 부족 해소를 위한 추석자금 공급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김남홍 기자]신용카드와 모바일 뱅킹이 보편화되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저성장, 저금리 시대에 효과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도움을 줘 일부 주요국에서는 현금을 줄이는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신용카드나 모바일 뱅킹 사용이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는 이같은 흐름에서 크게 뒤쳐져 있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시범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상황이다.

25일 한국은행이 최근 발간한 지급결제 보고서에 따르면 네덜란드·스웨덴·노르웨이·호주 등 주요국의 지급수단에 따른 연간 사회적 비용 총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0.42~0.83% 수준으로 조사됐다.

특히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현금의 사회적 비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거래건당 사회적 비용 역시 현금이 신용카드 다음으로 높았다. 거래건당 사회적 비용은 ▲신용카드(0.98~2.85유로) ▲현금(0.26~0.99유로) ▲직불카드(0.32∼0.74유로) 순이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현금 없는 경제: 의미와 가능’ 보고서를 통해 “현금 거래로 발생하는 직접적 비용만 GDP 1~2%에 이른다”며 “현금 없는 사회에선 매년 그만큼 경제가 더 성장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저성장·저물가·저금리 시대에 효과적인 거시정책의 수립이 가능하다는 것도 현금 없는 사회의 장점으로 꼽힌다. 저금리 상황에선 현금을 보유하는 기회비용이 매우 낮아지는데, 만약 금리수준이 0보다 내려가면 사람들은 현금을 은행에 맡기는 대신 각자 집안에 보관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중앙은행들이 명목이자율은 0 아래에서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금융위기 이후 유례없는 초장기 침체가 지속되고 저성장·저물가·저금리 환경이 고착된 가운데 많은 나라들이 양적 완화와 같은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기대거나 재정확대 정책으로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며 “현금 없는 사회에선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통화정책 틀 안에서 네거티브 명목금리를 설정할 수 있어 저성장 저물가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주요국에서는 사회적 비용이 큰 현금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 중이다.

스웨덴은 대중교통에서 현금 이용을 금지하고, 소매점에서 지폐와 동전과 같은 현금을 합법적으로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스웨덴과 덴마크는 2030년까지 현금 없는 사회로의 이행 완료를 계획, 새로운 지폐와 동전의 발행을 중단하고 기존 유통 중인 현금은 점진적으로 회수하고 있다.

영란은행은 디지털 법정 화폐의 발행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모델 등을 개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 화폐를 줄이려는 노력이 한창 진행 중인 이유는 현금 거래의 비효율성 때문이다. 현금 발행이나 ▲보관 ▲운반 ▲유통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한데다, 세금탈루 등에 따른 세수 손실도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시중에 풀린 통화량이 연일 사상 최대치를 경신할 정도로 아직 걸음마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화폐발행잔액(말잔)은 91조9264억원으로 전월보다 3713억원 늘어 역대 최고치를 나타냈다.

이는 5만원권의 발행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으로, 전체 화폐발행잔액의 77%를 차지하는 5만원권이 전달(69조8432억원) 대비 0.8% 늘어난 70조4308억원으로 집계됐다. 다만 ▲1만원권 ▲5000원권 ▲1000원권은 각각 전월 대비 ▲1.3% ▲0.4% ▲0.1% 줄었다.

이에 한은은 먼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시범사업을 계획 중이다.

동전 없는 사회는 상점이나 대중교통 이용 시 동전사용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예컨대 편의점에서 3000원을 내고 2800원짜리 물건을 산다면, 거스름돈 200원을 동전으로 받는 대신 계좌로 받거나 카드에 충전하는 방식이다. 일부 편의점 등에서는 이미 동전 충전 서비스를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소액결제망이 잘 돼 있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결제 계좌를 보유하고 있어 이러한 인프라를 잘 이용하면 동전사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 한은 측의 구상이다.

김정혁 한은 전자금융팀장은 “동전 없는 사회 구축 시범사업을 위해 편의점과 통신사, 금융기관, 대중교통, 지자체 등과 함께 시스템 변경 상품화 문제 등에 대해 협의를 하고 있다”며 “조만간 기본계획서를 확정하고 관련 예산을 확보해 내년 시범모델에 대한 테스트 등을 거친 뒤 시범운영 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또 주요 지급수단의 사회적 비용을 직접 추정, 이를 바탕으로 효율적이고 편리한 지급수단 이용 촉진 정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네덜란드·스웨덴·노르웨이·호주 등 주요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총 사회적 비용, 거래건당 사회적 비용과 손익분기점 등을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주요 지급수단의 사회적 비용을 직접 추정한 사례가 없다.

김규수 한은 금융결제국 결제연구팀장은 “지급수단의 효율성 여부를 평가하고 사회적 비용의 절감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한은도 국내 지급수단의 사회적 비용 추정방법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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