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난 ‘대 제국’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대우그룹은 1990년대 말 재계 서열 2위까지 뛰어올랐다.그러나 덩치에만 집착한 방만한 경영은 공룡 대우그룹을 쓰러뜨렸다. 전성기 시절 대우그룹의 주력업종은 자동차와 중공업, 전자, 건설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 회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대우그룹의 시초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섬유수출업체인 한성실업 무역부장 시절 자본금 500만원을 가지고 서울 충무로의 열평 남짓한 사무실에 트리코트 수출업체인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실업은 당시 정부의 수출 위주 정책에 힘입어 싱가포르에 이어 인도네시아와 미국 등지로 빠르게 사세를 확장했다. 설립 1년만인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였다.

1970년대 들어서 대우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아래 본격적으로 덩치를 키워 나갔다. 1973년 영진토건과 1974년 대우전자, 1976년 한국기계를 인수했고 1978년에는 대우조선해양의 전신인 옥포조선소와 대우자동차의 전신 새한자동차를 각각 넘겨받았다. 이후 1983년 대우전자와 대한전선 가전 사업부를 묶어 대우전자로 키웠고, 같은해 동양증권과 삼보증권을 사들여 대우증권을 설립했다. 이후 대우실업이 ㈜대우 바뀌면서 그룹 외형을 갖췄다.

90년대 들어 김 회장은 해외시장에 거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93년 루마니아와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등 동구권과 구소련 지역에 진출하는 등 확대경영 전략을 펼쳤다.

전성기였던 1998년 말 대우그룹은 계열사 41개와 국내 종업원 10만5000명, 해외법인 396개사, 해외사업장 외국인 종업원 21만9000명을 둔 공룡재벌로 성장했고 삼성, LG를 제치고 자산기준 국내 재계 2위로 우뚝 올라섰다.

대우그룹의 성장은 여기까지였다. 110여억달러에 달하는 해외투자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룹 전체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세계 경영을 포기하지 않았고 국·내외 사업장들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차입금을 꾸준히 늘려갔다.

몸집 키우기에만 ‘급급’…차입금만 싸여
너도나도 ‘각자도생’…상황은 ‘제각각’

특히 외한위기 이후 모든 기업들이 몸을 웅크리던 상황에서 김 회장은 쌍용자동차 인수를 선택하면서 대우그룹을 유동성 위기로 몰고 갔다.

이에 대우그룹은 1998년 12월 8일 41개 계열사를 10개사로 감축하는 구조조정 세부계획을 발표하고 1999년 1월 21일 수영만 부지 매각 등의 재무구조 개선 계획과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매각, 김 회장 보유주식 매각대금 3000억원 출연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잇달아 발표했다.

하지만 그룹의 운명을 결정지을 GM과의 협상과 대우전자‧삼성자동차 간 협상이 모두 실패하면서 대우는 벼랑 끝에 몰렸다.

결국 같은해 6월 대우 사장단 전원의 사표제출에 이어 7월 19일 대우그룹은 10조1000억원에 달하는 김 회장의 전 재산 담보라는 극약처방을 제시했다. 이어 채권단이 대우에 신규자금 5조원 지원을 결의, 김 회장은 퇴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 8월 이미 25곳으로 줄어든 전체 계열사 중 ▲㈜대우 ▲대우통신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자동차판매 ▲대우전자 ▲대우전자부품 ▲쌍용자동차 ▲대우캐피탈 ▲경남기업 ▲오리온전기 ▲다이너스클럽 코리아 등 12개 계열사가 채권단 관리하에 워크아웃을 맞이하게 됐다. 대우증권 등 나머지 13개 계열사는 독자적 회생의 길로 들어섰다.

㈜대우는 대우존속법인과 대우인터내셔널, 대우건설 등 3개사로 재탄생했다. 이들은 부실자산은 모 기업에 남겨두고 우량부문은 계열 분리하는 워크아웃을 진행했다. ㈜대우의 무역부분이 대우인터내셔널, 건설부문이 대우건설로 분리된 것이다. 이후 부실이 쌓인 ㈜대우와는 단절됐다.

◆대우사태의 원흉은 건설과 중공업

대우사태의 원인으로 꼽혔던 대우인터내셔널과 대우건설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내며 과거의 아픔을 털어냈다. 실제 대우건설은 지난해 9조9357억원, 포스코대우는 17조526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분리되기 이전인 ㈜대우의 1999년 매출 1조2000억원과 비교하면 2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분리 이후 줄곧 업계 1위를 고수하며 가장 잘 나가던 대우 계열사 중 하나였다. 대단한 것은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더 이상 무역종합상사로서 계열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같은 성과를 낸 것이다. 2010년 포스코에 인수돼 ‘포스코대우’로 다시 태어났다.

2006년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인수된 대우건설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금난 이후 2010년 한국산업은행의 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우빌딩을 포함한 양질의 유형자산을 매각했고, 상징이었던 ‘오리발 마크’의 로열티는 대우인터내셔널로 넘어갔다. 대우건설 자회사였던 경남기업은 2004년 대야건설과 합병했다.

▲ 사진=뉴시스

대우그룹의 중공업 분야는 대우조선과 대우종합기계로 2000년에 갈라져 나왔다. 두 회사는 분리 초기에는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지만 현재 상황은 좋지 못하다.

대우조선은 세계 LNG선 시장을 석권하는 등 영업 호조와 자구 노력에 힘입어 2002년 8월 대우 계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하지만 호황 속에서 덩치를 키웠던 대우조선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가 위축되면서 대형 선박 수요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어 실적이 악화된 것. 최근에는 분식회계 논란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실제 대우조선은 2013년부터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2조원대의 손실을 내며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대우조선의 지난해 영업손실은 2조9372억원으로 전년 대비 295.4% 늘었다. 2013년에는 7784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대우종합기계는 2005년 두산그룹 계열로 편입, 두산인프라코어로 사명을 바꿨다. 2007년 두산메카텍의 공작기계 사업부문과 미국 네바다 주 소재의 CTI사를 인수한 후 HCNG 엔진 분야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소형 건설장비 분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밥캣 등을 인수하는 등 세계 건설장비 분야 7위로 부상했다.

하지만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임직원들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서는 등 상황이 좋지 못하다. 특히 입사 1년차 20대 직원들에게도 퇴직을 권유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기업 이미지도 같이 추락했다. 실제 두산인프라코어의 올해 1분기 말(3월 31일) 기준 직원수는 3764명으로 지난해 말(12월 31일) 4041명보다 277명(6.9%) 줄어들었다. 실적도 크게 감소해 2014년 4530억원이었던 두산인프라코어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94.0% 줄어든 274억원을 기록했다.

◆뿔뿔이 흩어진 자동차 5형제

자동차는 대우그룹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다. 대우자동차로 불렸던 시절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와 함께 국내 3대 자동차 메이커로 불렸을 만큼 잘나갔다. 하지만 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한국GM(구 GM대우)과 쌍용자동차, 자일자동차판매(대우차판매), 자일대우버스, 타타대우상용차 등 5개의 회사로 나뉘어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2000년 11월 최종 부도처리 돼 법정관리에 들어간 대우자동차는 우여곡절 끝에 GM이 인수, 2002년 10월 17일 ‘GM대우’로 새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GM대우는 내수 시장에서 고전을 계속하다 2011년 1월 쉐보레브랜드로 흡수통합을 선언해 한국GM으로 재출범했다.

2000년 4월 대우 계열에서 정식으로 분리된 쌍용차는 2005년 상하이자동차 그룹에 인수됐다가 판매부진을 이유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2009년 법정관리체제에 들어간 쌍용차는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해고 사태로 노사, 노조간 갈등 등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2010년 말 인도의 마힌드라 그룹에 인수돼 최근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티볼리로 부활에 성공했다.

대우차판매는 대우자동차의 판매 부문을 떼어내 2002년 10월 ‘대우차 5형제’ 중 가장 먼저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그러나 2010년 3월에 GM대우가 결별을 선언하면서 부도 위기에 처했고 대우버스와 마찬가지로 영안모자에 인수되면서 자일자동차판매로 바뀌었다. 건설부문은 2011년 12월 대우산업개발로 분사했다.

인도 기업이 인수한 타타상용차 ‘반짝’
버스에 이어 판매까지…영안모자의 손길

대우버스는 ‘노사갈등’으로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었다. 2009년 대규모 감원을 추진하다가 노조의 파업과 회사의 직장폐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었던 것. 이후 사측에서 인력 구조조정안을 철회하면서 사태는 가까스로 진정국면에 들어섰으나 지속적인 인력감축계획의 일환으로 정규직 사원 채용은 더 이상 하지 않고 계약직만 지속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경영 상태가 가장 좋은 기업은 자동차 후진국인 인도 기업에서 인수해 매각 당시 가장 불안감이 컸던 타타대우다. 타타대우는 2015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에 매출 8097억원, 영업이익 527억원을 기록해 인수당시인 2004년보다 각각 2.7배, 4.7배 성장했다.

매각 가격이 1600억 원에 불과했던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대우차 생산 부문 중 ‘미운 오리’ 취급을 받았던 상용차 부문은 타타대우로 출범한 뒤 수출에 주력하면서 ‘백조’로 거듭났다. 주로 국내 시장에 트럭을 판매하던 내수업체 타타대우상용차는 아프리카 중동 인도 등 40여 개국에 수출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변신했다.

타타대우의 성장 배경에는 완전한 독립 경영을 보장하는 인도 기업 특유의 문화 덕분이란 분석도 있다.

◆ 전자‧금융 아직 살아있네

▲ KDB금융그룹 시절 대우증권. 사진=뉴시스

주력 분야였던 전자에서는 소소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우전자는 지속적으로 규모를 줄이다가 2002년 말 주력사업부문이 대우모터공업으로 양도됐고 이 회사는 2003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재출범했다. 채권단이 경영정상화를 위해 2005년 매각에 나섰지만 인수가격과 매각 조건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줄줄이 무산되다가 2013년 2월 8년만에 동부그룹 품에 안겼다.

이밖에 대우그룹 해체 전 채권단에 인수된 대우증권은 대주주가 한국산업은행으로 변경됐다가 2009년 한국산업은행 민영화에 따라 새롭게 출범한 KDB금융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현재는 미래에셋에 매각돼 미래에셋대우로 다시 태어났다.

또 다른 대우그룹의 금융회사였던 다이너스클럽코리아는 2001년 8월 현대자동차에 매각돼 현대카드로 탈바꿈했고, 대우캐피탈은 아주그룹으로 편입돼 아주캐피탈로 사명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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