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만큼 역사도 ‘각양각색’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해외 유수의 완성차 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어느 때 보다 높다. 수입차에 대한 정보도 이전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이같은 관심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입차 업체들 간의 관계나 구체적인 역사까지 알기란 웬만한 관심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준비했다. 수입차 업체들의 관계와 숨겨진 역사에 대해 파헤쳐 본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1998년 이후 현대자동차그룹 안의 계열사로 한 솥밥을 먹고 있다. 기아자동차가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내자 현대자동차가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두 회사는 부품과 디자인 등 여러 분야를 공유하며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입차 업계에서도 이같은 관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의 폭스바겐그룹과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이탈리아의 피아트그룹, 프랑스의 르노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산하 브랜드들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다양한 소비자들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원조

다양한 브랜드로 수많은 수요층을 공략하는 전략은 GM이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생부터가 쉐보레를 중심으로 여러 완성차 업체들이 모인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현재 GM은 북아메리카를 제외한 24개국에서 28개의 브랜드를 가지고 169개국에서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다.

GM은 포드, 크라이슬러와 더불어 미국 자동차 업계의 빅3로 불린다. 하지만 포드나 크라이슬러와는 달리 GM을 대표하는 차량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GM은 수많은 하위 브랜드를 대표하는 지주회사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같은 GM차량이라 하더라도 브랜드가 다른 경우가 많다. 이는 GM이 과거부터 취해온 세계 각지의 수많은 명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합병해 브랜드를 수집해온 역사와 관련이 깊다.

GM의 다양한 브랜드를 통한 마케팅 전략의 유래는 약 1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의 자동차 시장은 군소 자동차 제작사들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난립해 있었다. 하나의 파이를 가지고 여러명이 나눠먹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경쟁은 처절할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기란 더욱 힘들었다.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해 시장을 장악해버린 회사가 바로 포드다. 컨베이어 벨트로 대표되는 대량생산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를 내놓으면서 자동차 시장을 접수해 버린 것이다. 이 같은 포드의 전략에 많은 자동차 제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에 살아남은 브랜드들은 생존 방법을 구상했고, 이 과정에서 경쟁력 있는 회사들끼리 연합체를 구성하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 GM이다.

GM은 가격을 줄이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같은 차를 찍어내는 포드와는 다른 전략을 취했다. 하위 브랜드를 전략적으로 재편해 등급에 따라 분류한 뒤 다양한 차량과 옵션을 제공한 것이다.

예를 들면 캐딜락은 부자들을 위한 호화스러운 고급차량, 쉐보레는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 젊은이 취향에 맞는 차량 같은 식이다. 또 차량 색깔을 옵션으로 정할 수 있게 한 최초의 회사도 GM이다. GM의 이 같은 전략에 포드는 콧방귀를 끼며 무시했지만 결국 큰 성공을 거뒀고, 비웃던 포드는 이후 GM을 단 한번도 넘어서지 못했다.

대중차의 대명사로 거듭난 ‘쉐보레’
몰락부터 재기까지 ‘파라만장’ 캐딜락

이처럼 수많은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GM이지만 대표하는 브랜드는 따로 있다. 바로 쉐보레가 그 주인공이다. 쉐보레는 1911년 윌리엄 듀런트와 루이 쉐보레가 함께 설립한 자동차 제조회사로 미국 대중차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쉐보레는 1912년 레이서 출신이었던 루이 쉐보레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 개발한 ‘클래식 식스’가 큰 인기를 끌면서 안정 궤도에 안착했다. 하지만 대중적인 차를 만들려고 했던 윌리엄 듀런트와 레이싱카에 중점을 뒀던 루이 쉐보레는 빈번히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루이 쉐보레가 회사를 떠나면서 파국을 맞게 됐다.

루이 쉐보레가 떠난 후 듀런트의 쉐보레는 대중차 개발에 집중했다. 이미 대중차 시장에는 경쟁사인 포드가 먼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포드 ‘모델 T’의 대항마로 출시한 ‘490’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했고, 이 시기에 GM 사장으로 복귀한 듀런트에 의해 GM과 합병해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숙명의 라이벌

1923년 쉐보레는 공랭식기관을 개발해 포드자동차와의 경쟁을 본격화 했다. 앞바퀴 독립식서스펜션(1934년)과 유압브레이크(1936년), 파워윈도우(1954년) 등 다양한 첨단 장치를 실용화하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모델들을 연이어 출시했다. 코르벳과 벨에어 왜건형, 코베어, 카마로, 카발리에 등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에는 소형차를 앞세워 브라질과 영국, 독일, 호주, 일본 등 해외 시장에도 진출했는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국내 제작사인 새한자동차에서 생산된 제미니도 쉐보레 소형차 쉬베트의 뱃지 엔지니어링 모델이다. 지금은 없어진 대우자동차도 GM의 산하브랜드로 국내시장에서 활약했지만 2011년 쉐보레에 통합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쉐보레가 GM에서 대중차 생산을 맡고 있다면 캐딜락은 고급차 브랜드를 대표하고 있다.

캐딜락은 1901년 설립된 헨리 포드의 ‘헨리 포드 컴퍼니’를 전신으로 한다. 헨리 포드는 포드의 창업 주로 이후 ‘포드 모터 컴퍼니’를 설립해 헨리 포드 컴퍼니를 떠나게 된다. 이후 공동 창업주인 헨리 릴런드는 파산위기에 있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 ‘캐딜락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캐딜락이란 브랜드 이름은 1701년 미국 디트로이트시를 개척한 프랑스 귀족이자 탐험가인 ‘르쉬외르 앙투안드라 모스 캐딜락’경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앰블럼 또한 캐딜락 가문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왔다.

캐딜락이 제작한 첫 차량은 1902년 프로토타입 모델인 ‘Runabout and Tonneau’이다. 이 차량은 당시 획기적인 연비와 성능을 자랑했는데 리터 당 2.4㎞를 이동할 수 있었고, 시속 48㎞로 달릴 수 있었다.

1903년 프로토타입을 기반으로 양산형 모델 ‘모델 A’를 선보였고, 상류층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1907년에는 세계 최초로 250개 부품을 표준화해 부품 호환이 가능한 ‘모델 S’를 선보여 자동차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불린 드와 트로피’를 수상했다.

이후 헨리 릴런드는 캐딜락을 GM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시킨다는 조건으로 1909년 캐딜락 오토 컴퍼니를 제너럴모터스에 매각했다. GM에 매각된 후에도 캐딜락은 미국의 대표 고급차 브랜드로 승승장구했다. 특히 1945년 이후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리던 미국의 경기상황과 맞물려 고급차 수요는 크게 늘어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때의 캐딜락은 1년을 주기로 모델을 변경할 정도로 잘나갔다. 하지만 캐딜락의 ‘리즈시절’은 오일쇼크가 발발하면서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오일 쇼크가 닥치면서 미국 자동차시장에서는 작은 배기량의 자동차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캐딜락도 엔진의 다운사이징과 쉐보레에서 판매되고 있는 차량을 기반으로 트렌드에 맞는 차량을 생산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전의 고급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로고만 캐딜락인 ‘껍데기’ 고급차를 시장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할아버지들의 바퀴 달린 쇼파’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돌기도 했다. 캐딜락의 부진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고 많은 이들은 캐딜락이라는 브랜드가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캐딜락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차량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1999년 ‘캐딜락 CTS’와 ‘캐딜락 XLR’을 공개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초기의 캐딜락 차량처럼 과감하면서도 세련미를 앞세운 두 차량은 출시 이후 괄목할만한 판매고를 올렸고, 미국을 대표하는 고급차의 영예를 다시 한 번 가져다 줬다. 지금은 미국 대통령의 의전차량을 생산할 정도로 잘나가고 있다.

이밖에도 GM은 ▲뷰익 ▲홀덴 ▲한국GM ▲GMC ▲AC델코 ▲오펠 ▲복스홀 등 세계 각국에 다양한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이름만 빌려준 삼성…본체는 프랑스에
자존심 구긴 지분매각…르노-닛산 탄생 

◆방만경영의 최후

GM만큼 다양하진 않지만 프랑스에도 여러 브랜드를 가지고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업체가 있다. 바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얘기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공기업이었던 르노가 1996년 민영화된 이후 닛산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만들어진 협력 공동체다. 공식적으로는 전략적 파트너쉽이지만 르노가 닛산의 지분 37%를 인수했기 때문에 사실상 닛산이 르노의 자회사다. 실제 르노는 닛산에 대한 의결권을 가지고 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현재 200여개 국가에서 850만대의 차량을 판매하고 있다. 이는 토요타(1023만대), 폭스바겐(1014만대), GM(992만대)에 이은 세계 4위 규모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포함돼 있는 브랜드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브랜드는 ‘르노삼성자동차’다. 르노삼성자동차는 삼성자동차가 외환위기 당시 경영 상황이 나빠지면서 르노에 매각된 것을 시작으로 한다. 처음에는 르노의 지분율과 삼성자동차의 지분율이 비슷하게 형성돼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삼성’이라는 브랜드 네임만 차용하고 있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닛산은 1966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해외에 진출해 세계 곳곳에 공장을 짓는 확장형 경영을 펼쳤다. 하지만 판매를 중시한 토요타에 실적에서 점점 뒤쳐졌고, 확장한 공장들은 부채로 돌아와 닛산에 큰 부담을 안겼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일본의 경기불황이 닥치면서 적자 행진을 지속하다 르노에 지분 37%를 팔게 됐다. 이후 브라질 출신의 루노 임원진 카를로스 곤이 닛산의 신임 CEO로 취임하면서 3년간 전체 직원의 15%인 2만2900명을 감원하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미쓰비시 자동차를 인수하면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라인업을 한 층 더 보강했다.

이밖에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는 ▲다치아 ▲라다 ▲인피니티 ▲닷선 ▲니스모 등 전세계에 걸친 다양한 브랜드를 산하 계열사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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