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타고 있는 자동차, 원조는?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해외 유수의 완성차 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어느 때 보다 높다. 그만큼 수입차에 대한 정보도 이전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수입차 업체들 간의 관계나 구체적인 역사까지 알기란 웬만한 관심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준비했다. 수입차 업체들의 관계와 숨겨진 역사에 대해 파헤쳐 본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1998년 이후 현대자동차그룹 안의 계열사로 한 솥밥을 먹고 있다. 기아자동차가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내자 현대자동차가 인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두 회사는 부품과 디자인 등 여러 분야를 공유하며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입차 업계에서도 이같은 관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의 폭스바겐그룹과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이탈리아의 피아트그룹, 프랑스의 르노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산하 브랜드들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다양한 소비자들의 욕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는 상황이다.

▲ 폭스바겐 비틀의 원형이 된 ‘KDF바겐’을 만든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국민차의 반란

폭스바겐 그룹이 완성차업계에서 갖는 시장 지배력과 영향력은 세계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주회사인 폭스바겐AG를 필두로 폭스바겐과 포르쉐, 아우디, 벤틀리, 스카니아 등 막강한 라인업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상용차부터 슈퍼카까지 모든 차량을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회사로, 완성차 업계의 ‘올스타즈’로 불리고 있다. 지난해 디젤 엔진 배출가스 수치를 조작하면서 큰 위기를 겪으면서도 건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스바겐 그룹은 아돌프 히틀러의 ‘국민자동차’ 계획으로부터 출발한다. ‘국민자동차’라는 뜻의 폭스바겐이 사명으로 쓰인 것도 이 때문이다. 1934년 히틀러는 이 계획을 포르쉐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게 맡겼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요구조건에 맞춰 ‘KDF바겐’이라는 차량을 만들어 냈고, 이것이 폭스바겐 비틀의 원형이 된다. 이 KDF바겐을 만들던 볼프스부르크 공장과 회사가 실질적인 폭스바겐의 시작인 것이다. 실제로 폭스바겐 공식 연혁도 1934년부터 시작한다.

바이크부터 상용차까지…완성차 ‘올스타즈’
포르쉐 一家의 노림수, 결국은 ‘가족 기업’

KDF바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산공장이 군수공장으로 전환되면서 제대로 생산되지 못했다. 독일 패전과 동시에 포르쉐 박사는 미국 포드사에 회사를 매각하려 했지만 포드의 거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공장을 재가동하면서 본격적인 생산에 나섰고, 국민차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적 배경 덕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특히 폭스바겐 비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돼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폭스바겐은 다양한 브랜드들을 인수하면서 덩치를 불려 나갔다. 폭스바겐은 1964년 아우토 유니온(아우디)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세 확장에 나서게 된다. 아우디는 1899년 아우그스트 호르히가 독일 쾰른에서 설립한 호르히사(社)를 기원으로 한다. 호르히는 1909년 모터스포츠에 너무 열중한다는 이유로 호르히사에서 쫒겨난 후 다른 호르히사를 설립하지만 상표법 위반으로 고소당하면서 무산된다. 이에 호르히는 자신의 이름인 호르히(듣다)에 착안해 라틴어로 ‘듣다’라는 의미의 아우디로 회사이름을 변경하고 고급세단 개발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1932년에 일어난 경제대공황 때 대부분의 유럽 자동차업계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반면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은 이를 틈타 유럽 시장 공량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호르히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호르히사와 데카베, 반더러와 합병해 ‘아우토 유니온’을 출범시킨다. 이때부터 4개의 원이 겹쳐진 형태의 마크를 사용했다. 이는 합병한 4개의 회사를 의미한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동그라미 안에 합병한 회사들의 로고를 각각 새긴 점이다.

아우토 유니온을 처음 인수한 곳은 라이벌 업체인 ‘메르세데스-벤츠’다. 2차 세계대전으로 아우토 유니온의 많은 공장이 파괴됐고, 대부분의 공장들이 동독 영토에 귀속되면서 위기에 봉착하자 벤츠가 지분을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1964년 벤츠는 아우토 유니온을 폭스바겐에 매각했다. 1969년에는 폭스바겐이 NSU사를 인수함과 동시에 아우토 유니온과 합병시키면서 지금의 아우디가 탄생했다. 이때부터 50년 가까이 폭스바겐 그룹 산하의 고급 승용차 브랜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폭스바겐 비틀의 원형이 된 ‘KDF바겐’.

◆우리는 형제

포르쉐와 폭스바겐은 형제 기업이라 해도 무방하다. 설립 당시부터 협력관계를 넘어 한 회사처럼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특히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폭스바겐 비틀의 설계자이기도 했고 이 플랫폼을 가지고 만든 스포츠카가 포르쉐사의 첫 번째 차량인 ‘356’인 점을 봐도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공유를 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포르쉐가 지금처럼 폭스바겐 그룹 산하 브랜드가 된 과정은 좀 특별하다. 2008년 포르쉐가 폭스바겐을 인수하겠다고 포문을 열면서 인수전이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포르쉐 일가의 배만 불리는 합병이 됐기 때문이다. 인수전이 마무리 된 이후 포르쉐AG와 폭스바겐 모두 폭스바겐 그룹의 자 회사가 됐고, 그룹 지분의 절반 이상을 포르쉐 지주회사가 확보했다. 또 이 지주회사의 지분은 포르쉐-피에히 일가가 지분 50%를 가지면서 그룹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결국 누가 누구를 인수하느냐는 겉모습이었을 뿐 포르쉐 일가와 그 방계 가족인 피에히 일가가 두 회사 모두를 완전한 가족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페라리의 영원한 라이벌인 람보르기니도 폭스바겐의 자회사 중 하나다. 세부적으로는 폭스바겐그룹에서 ‘아우디 앤 람보르기니 디비젼’으로 분류된다. 람보르기니가 폭스바겐 그룹에 편입된 건 1998년으로 아우디에 의해 인수됐다. 1963년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창립한 이후 람보르기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카 ‘미우라’ 등을 제작하면서 명성을 날렸지만, 판매 부진에 빠지며 경영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페루치오는 결국 1972년과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스위스의 사업가이자 자신의 친구인 로르주 앙리 로세티에게 람보르기니를 매각했다. 1978년에는 파산하면서 이탈리아 법원이 운영권을 갖기도 했다. 이후 람보르기니의 소유권은 스위스 음식업체 대표였던 장 끌로드 와 패트릭 밈란 형제를 거쳐 폭스바겐그룹의 아우디AG에 최종 매각됐다. 폭스바겐 그룹에 편입된 뒤에는 파라만장 했던 과거와 달리 꾸준히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이밖에도 폭스바겐 그룹은 ▲영국 프리미엄 자동차 회사 벤틀리 ▲프랑스 고성능 자동차 회사 부가티 ▲체코의 중저가형 브랜드 스코다 ▲독일 상용차 제조사 만 ▲스웨덴 상용차 스카니아 ▲이탈리아 고성능 바이크 회사 두가티 ▲피아트를 모태로 한 스페인 자동차회사 세아트 등 다양한 브랜드를 통해 오토바이부터 트럭까지 모든 차량을 생산하고 있다.

◆이탈리아 국민차

이탈리아에서 국민차로 칭송받는 피아트지만 국내시장에선 인지도가 낮다. 피아트 브랜드로 수입된 차량이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본사에서도 적극적으로 공략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아트-크라이슬러 그룹 산하 브랜드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페라리를 필두로 크라이슬러와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등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고급 브랜드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피아트는 1899년 지오반니 아그넬 리가 자신의 지인 8명과 함께 설립한 자동차 회사다. 회사명인 ‘FIAT’는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의 약자로 본사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 토리노에 위치해 있다. 아그넬리는 대중이 탈 수 있는 저렴하면서도 성능이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대중차 생산에 관심을 쏟았다. 1세대 피아트 티포와 피아트500에서 아그넬리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미국 포드사의 창업주 헨리포드와도 친분이 깊었던 그는 포드로부터 대량생산 체계를 받아들이기도 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아그넬리 사망 이후 잠시 위기를 겪었던 피아트지만 1948년 공장을 복원한 뒤 활기를 되찾았다.

대표 산하 브랜드인 페라리는 1969년부터 피아트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당시 페라리는 뛰어난 성능과 그랑프리 연속 우승으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이를 감당하지 못했던 페라리의 창업주 엔초페라리는 피아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페라리는 지분 50%를 피아트에 넘겨준 뒤 피아트 그룹 산하로 들어가게 됐고 생산량을 맞출 수 있었다. 1988년 엔초 페라리 사망 이후 페라리는 피아트에 지분 90%를 넘기면서 계열사로 편입됐다. 현재는 독립법인으로 활동 중이다.

본체는 대중차에 몰두…계열사는 ‘슈퍼카’
남이 뱉은 떡 먹고 혼수상태 빠진 ‘피아트’

이탈리아 고급차의 대명사인 마세라티도 피아트의 주요 산하 브랜드 중 하나다. 마세라티는 1914년 이탈리아 볼로냐 지방에서 마세라티 가문의 다섯 형제가 설립했다. 처음에는 슈퍼카 브랜드로 명성을 날렸다. 실제 1957년까지 23개의 챔피언쉽과 32개의 F1 그랑프리 대회 등에서 500여 회의 우승을 기록했다. 이후 경주용 차량의 제조에서 럭셔리 세단을 만드는 데 주력했지만 경영난으로 프랑스의 시트로엥, 이탈리아의 데토마소 그룹을 전전한 끝에 거대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그룹 산하로 들어가게 됐다. 덕분에 같은 그룹안에 있는 페라리와 부품과 엔진을 공유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자동차 작명에 바람이름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피아트-크라이슬러 그룹의 또 다른 축인 크라이슬러는 2014년 피아트 계열로 완전히 편입됐다. 크라이슬러는 한 때 빅 3로 세계자동차 업계를 좌지우지 했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서 마케팅 전략 실패로 경영 악화와 판매 부진으로 고전했다. 이에 1976년 포드 출신인 리 아이아코카를 사장으로 영입하면서 1982년 크라이슬러의 고질적인 부채 15억 달러를 일시에 갚고 7억달러의 순이익을 남기는 신화를 일궈냈다.

하지만 아이아코카가 은퇴하면서 크라이슬러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1998년 메르세데스 벤츠로 유명한 다임러 그룹과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지만 융화 실패로 다시 분사하게 된다. 2007년에는 서버러스 캐피탈 메니지먼트라는 사모펀드 업체에 팔렸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 미국 정부로부터 금융구제를 받았다. 파라만장한 역사를 써내려가던 크라이슬러는 결국 2011년 피아트에 상당수 지분을 매각했고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아트는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직후 경영난에 허덕이며 그룹 전체의 존폐여부도 불확실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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