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만 북적북적, 씀씀이는 자린고비

[파이낸셜투데이=김유진 기자] 국내 유통업계의 ‘큰 손’이 된 외국인 관광객. 이들 덕분에 국내 화장품과 백화점, 면세점 사업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수상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들이 한국 시장에 적응하면서 ‘짠돌이’로 변하는 탓에 상인들로서도 예전처럼 마냥 반가운 발길만은 아니게 된 것. <파이낸셜투데이>가 창간 11주년을 맞아 외국인의 지갑에 희비가 엇갈리는 쇼핑 코스, 명동과 남대문 일대를 직접 돌아봤다.

지난 4일 오전 9시 외국인 관광객들이 필수여행코스로 들린다는 서울 을지로입구 지하철역. 평일 이른 시간이여서 그런지 역은 한산해보였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지하상가에 들어서자 이른 시간임에도 상인들은 영업 준비로 분주했다.

한 지하상가 관계자는 “지하상가 오픈시간은 보통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지만 일찍 문 여는 가게들도 많다”며 “경기가 안 좋으니 조금이라도 일찍 가게를 열고 손님들을 받으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위치한 지하상가 한류스타 용품숍이 지난 4일 오전 9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우리말로 “깎아주세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지하상가를 찾는 관광객들은 훨씬 늘었다. 영업도 안 하는 가게 쇼윈도를 들여다보며 물건들을 구경하는가 하면 영업 준비도 덜 된 가게에 들어가 쇼핑을 즐기는 등 다양했다.

특히 한류스타들의 사진이 들어간 수건이나 열쇠고리, 사진 등의 기념품 상점에 관광객들이 몰렸다. 손님들은 쉽게 지갑을 열지는 않았다. 일본인 관광객은 작은 열쇠고리를 집더니 가격을 물어보지도 않고 가격 흥정부터 했다.

“깎아주세요”라며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 관광객과 어설픈 일본어로 “이건 3개 5000원으로 이미 할인된 가격이다. 더 이상 할인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가게 주인이 작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저렴하게 쇼핑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배운 모양이다.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외국인들이 요즘에는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가격흥정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값이 많이 나가지 않는 물건을 들고 몇 백원이라도 덜 내겠다며 가격 흥정하는 관광객들을 보는 마음은 씁쓸했다.

역 바로 앞에 위치한 백화점 오픈시간이 가까워지자 외국인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달려온 듯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서있는 관광객들도 볼 수 있었다. 이날 서울 날씨는 강한 돌풍이 부는 등 좋지 않았지만 관광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화점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 외국인 관광들이 지난 4일 오전 11시 서울 남대문로 롯데면세점 화장품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 백화점이 개장하고 관광객들과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롯데백화점이 짧은 임시연휴기간을 맞아 ‘BLACK SHOPPING DAYS’ 행사를 시작한 첫 날이었지만 매장은 다소 한산했다.

8층을 지나 9층으로 들어서자 쇼핑 열기가 뜨거웠다. 명동에 위치한 롯데 타운은 8층까지는 일반 백화점이지만 9층부터는 면세점이 위치해있다. 외국인 관광객들 대부분은 면세점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9층에 들어서자마자 네이처리퍼블릭 등 브랜드숍 매장들이 있었다. 아침부터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근처에 있는 에뛰드하우스와 스킨푸드 등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브랜드숍의 한 직원은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매해가는 고객들이 많다”며 “여기 매장들은 낱개 판매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해당 매장에서는 20개 가까이 될 것 같은 마스크팩을 묶어서 판매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수분크림이나 핸드크림, 선크림 등 각종 화장품들도 3~4개씩 묶여 있었다. 낱개로 살 수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파는 제품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다른 가게 점원도 “면세점에서는 보통 낱개 판매를 하지 않는다”며 “우리 매장에서 핸드 크림 등을 사려면 최소 3개는 사야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에 면세점에서 소량구매를 원하는 국내고객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매장에서는 한국에 방문해 선물용으로 대량 구매해가는 관광객들이 이득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맞춘 상품들이 대부분이기다. 해당 제품을 구매하고 싶은 고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여러 개를 한꺼번에 구매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손님 몰리는 곳은 따로 있어…‘희비’ 교차
비싸거나 저렴하거나…일부 매장만 ‘호황’
“낱개로는 안 팔아요”…20장씩 묶어 판매
소량 구매하는 국내 고객은 오히려 ‘소외’

 

▲ 서울 소공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너편 도로변이 지난 4일 오전 11시 30분 외국인 관광객들이 타고 온 버스들로 가득 차 있다.

롯데백화점을 나와 근처에 있는 신세계백화점으로 향했다. 근처 도로에 불법 주차된 관광버스는 방문한 관광객들이 많음을 짐작케 했다. 신관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공중에 걸린 <쿵푸팬더>의 주인공 팬더 인형이었다. 중국 관광객들을 끌기 위한 백화점의 노력이 엿보였다. 인형을 본 관광객들은 신기해하며 기념촬영도 하며 즐거워 보였다.

매장에 비치된 책자에서도 중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를 볼 수 있었다. <쿵푸팬더> 주인공의 이미지들로 꾸며진 해당 책자는 중국인들이 자주 찾는 매장들의 정보만 적어놓는 등 중국인만을 위한 맞춤형 쇼핑 책자였다.

신세계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백화점을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들은 주로 설화수나 오휘 등 화장품 가게로 향하는 편”이라며 “최근에는 롤렉스와 같은 명품관도 많이 방문한다”고 설명했다.

▲ 서울 소공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신관 1층이 지난 4일 오전 11시 30분 영화 <쿵푸팬더> 캐릭터로 꾸며져 있다.

낮 12시가 넘은 시간, 신세계백화점을 나와 바로 옆에 위치한 남대문시장으로 향했다. 이날 서울은 돌풍이 부는 등 야외활동하기에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남대문시장에는 상인들과 쇼핑을 하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시장 입구에는 영어로 쓴 홍보문구를 붙여놓은 노점상들이 눈에 띄었다. 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보였다.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듯 ‘KOREA’라고 적혀있는 티셔츠를 판매하는 노점상에는 관객들로 붐볐다.

발걸음을 옮겨 시장 깊숙이 들어가 보니 시장 곳곳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수건 가게와 그릇 가게를 비롯해 길거리 음식을 사먹기 위해 줄 서 있는 등 모든 곳에서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남대문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네이처리퍼블릭과 토니모리, 미샤 등 많은 브랜드숍들이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곳의 가게들 역시 면세점들처럼 수십 개씩 묶은 마스크팩을 가게 밖 진열장에 전시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브랜드숍 직원은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상품이 뭐냐는 질문에 어설픈 한국어로 답했다. 가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 일도 있었다.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하기 위해 고용한 외국인 직원이었지만 정작 국내 고객들은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은 “마스크팩과 같은 저렴한 상품을 찾는 관광객이 많은 편”이라며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은 마스크팩만 5만~6만원 어치를 사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브랜드숍 직원은 “최근에는 동물 마스크팩이나 미백효과가 뛰어난 치약도 인기가 좋다”며 “중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다른 브랜드 상품들도 같이 판매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매장 한편에는 해당 브랜드숍 제품이 아닌 여러 브랜드의 화장품부터 치약, 샴푸 등 여러 가지 상품들을 쌓아놓고 영업 중이었다.

▲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4일 낮 12시 강풍 등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남대문로 남대문시장을 찾아 쇼핑을 하고 있다.

◆‘큰 손’만 챙겨

이날 남대문 시장 곳곳에는 빨간 조끼를 입고 돌아다니며 길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하고 있는 안내원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를 진행 중인 한국관광공사의 대학생 홍보대사들도 눈에 띄었다.

시장은 어느 때보다 성황이었다. 연휴를 하루 앞두고 하나라도 더 상품을 판매하려는 상인과 해외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사려는 관광객들로 열기가 후끈했다. ‘큰 손’인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만 열을 올리는 상황에 오히려 국내 소비자들이 소외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기우이길 바라며 시장을 뒤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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