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봄도 비껴간 왕회장의 말년

[파이낸셜투데이=한종해 기자] 말년이 좋지 않다. 국내 굴지의 기업을 키워낸 ‘왕회장’이 완전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게 됐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그것도 아들에게 밀려나서다. 껌 하나로 아시아를 집어삼킨 ‘맨손신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얘기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사를 되짚어 봤다.

롯데그룹의 진정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롯데제과가 25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등기이사 재선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으면서 신 총괄회장은 49년만에 롯데제과의 등기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롯데그룹 측은 “신 총괄회장은 고령으로 인해 정상적이 경영활동이 어렵다고 판단돼 임기 만료에 따른 재선임을 하지 않기로 했다”며 “신규 선임된 황각규 사장은 롯데제과가 글로벌 식품사로 도약하기 위한 조력자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러진 지휘봉

신 총괄회장의 이번 퇴임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롯데제과가 롯데칠성·롯데푸드·롯데리아 등 식음료 계열사 지분을 상당수 보유, 그룹 내 중간 지주회사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제과는 현재 남아있는 롯데그룹 내 순환출자 고리 67개 가운데 54개 고리에 걸쳐져 있다. ‘롯데로지스틱스→롯데상사→한국후지필름→롯데쇼핑→대홍기획→롯데제과→롯데로지스틱스’와 ‘대홍기획→롯데제과→롯데리아→롯데정보통신→롯데쇼핑→대홍기획’ 등이 대표적이다.

신 총괄회장은 또 25일 열린 호텔롯데 정기 주총 안건에 ‘신 총괄회장의 등기이사직 재선임의 건’이 포함되지 않으면서 호텔롯데 등기이사직에서도 물러나게 됐다.

신 총괄회장은 2011년 2월 차남 신동빈 회장을 한국 롯데그룹 회장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경영 2선으로 물러났다. 이후 롯데제과·호텔롯데·롯데쇼핑·부산롯데호텔·자이언츠구단 등 한국 주요 계열사와 지주회사격인 일본 롯데홀딩스의 이사직은 유지했다. 그러나 두 아들 간 다툼에 그룹 1인자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5년 7월 신동빈 회장이 일본롯데홀딩스 대표이사로 선임되자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은 그 해 7월 27일 아버지인 신 총괄회장과 일본롯데홀딩스를 방문하고 신동빈 회장 등 일본롯데홀딩스 이사 6명을 해임했다. 그러자 신동빈 회장은 일본롯데홀딩스 긴급 이사회를 소집, 자신의 이사 해임을 이사회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무효행위로 규정하고 신 총괄회장을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신동주 전 부회장은 한국을 방문, 자신을 일본롯데홀딩스 사장에 재임명한다는 신 총괄회장의 지시서 내용과 함께 신 총괄회장이 신동빈 회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영상을 공개하며 맞불을 놨다.

신동빈 회장은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을 벌인 데에 대한 대국민 사과문 형식의 입장을 발표하고, 호텔롯데의 일본 지분율 축소와 그룹 순환출자 해소, 지주사 전환을 약속했다.

롯데제과·호텔롯데 대표에서 퇴진
성년후견인 심사, 건강 ‘적신호’

이후 신동빈 회장은 호텔롯데 비공개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신동주 전 부회장을 호텔롯데 등기이사에서 해임했다. 지난해 10월 반격에 나선 신동주 전 부회장은 광윤사 주주총회를 열어 신동빈 회장을 광윤사 이사에서 해임시켰다. 지난 2월에는 일본롯데홀딩스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사 전원의 해임을 요청했으며 ‘후계자는 장남’이라는 내용의 신 총괄회장의 영상 인터뷰를 공개했다.

그러나 2016년 3월 열린 롯데홀딩스 임시주주총회에서 신동빈 회장이 승리하면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제안한 의안은 모두 부결됐고 이에 따라 8개월여간 벌어진 골육상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신 총괄회장은 우리 경제의 오늘을 일궈낸 재계 1세대 인사들 중 유일하게 생존한 총수다. 고 (故) 구인회 창업주와 故 최종건 창업주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고, 故 이병철 창업주는 1987년 폐암으로, 故 정주영 창업주는 2001년 폐렴 합병증인 급성호흡부전증으로, 故 조중훈 창업주는 2002년 당뇨와 고혈압 등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 인생사

마지막으로 남은 1세대 기업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신 총괄회장의 말년은 쓸쓸할 뿐이다.

▲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사진=뉴시스

신 총괄회장은 1922년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빈농 신진수·김필순 씨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신 총괄회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1936년 면장을 지낸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 졸업 후 백두산 밑에 있는 ‘명천국립종양장’의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있었다.

신 총괄회장이 18세가 되던 1940년 같은 마을의 노순화 여사를 아내로 맞아 결혼하고 경남 양산에 있는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로 직장을 옮겼다. 직장 부근에서 혼자 하숙을 하던 신 총괄회장은 이듬해 단돈 83엔을 쥐고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 도착한 신 총괄회장은 스기나미에 있는 연립주택의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기거했다. 대학진학을 위해 와세다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고 생활비를 위해 우유배달을 했다.

신 총괄회장이 사업의 기회를 잡은 것은 전당포와 고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일본인 하나미쓰 노인은 매사에 성실했던 신 총괄회장을 눈여겨봤다. 1944년 신 총괄회장은 하나미쓰 노인이 전액 출자한다는 조건으로 군수용 커팅오일 제조공장을 차릴 것을 제의 받았다. 신 총괄회장은 이를 받아들여 도쿄 아오모리에 공장을 임차해 사업에 착수했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공장은 잿더미가 됐고, 신 총괄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껌’ 하나로 아시아 재패
가족관계 복잡, 형제간 혈투

신 총괄회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귀국을 종용하던 주변을 물리치고 1946년 도쿄 스기나미구의 낡은 창고에 ‘히라끼 특수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포마드 등 유지제품을 생산·판매했다. 신 총괄회장의 이 같은 직관은 전쟁 직후 생필품이 귀했던 일본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졌고 1년 반 만에 하나미쓰 노인에게 빌린 6만엔을 전부 상환할 수 있었다.

기세를 이어 신 총괄회장은 추잉껌 제조사업에 뛰어들었다. 1947년 약제사 1명을 고용하고 수동식 기계를 설치, 2엔짜리 풍선껌을 만들어 자금을 모았고, 1년 뒤 드디어 ‘롯데’를 설립했다.

신 총괄회장은 다양한 마케팅기업을 도입해 일본 껌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1959년 신 총괄회장은 자본금 2000만엔의 롯데상사를 설립하고 1961년부터는 초콜릿 제조사업에 착수, 롯데는 7년만에 연매출 700억엔에 종업원 3000여명의 일본 최대 종합과자 메이커로 성장했다.

무너진 성공신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국내에 일본 자본 진출이 늘어나자 신 총괄회장은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71년 신 총괄회장은 국내 껌 생산을 개시하고 1973년 기업공개 및 상장을 했다. 이후 한국 롯데그룹은 급속하게 성장, 현재 국내 재계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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