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투데이=이혜현 기자]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으로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향년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최연소 국회의원에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으로 32년간의 군정을 끝내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주인공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화려한 이력만큼 파란만장했다.

32년간의 군사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최초의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은 거산이라는 아호에 걸맞게 정치인생 절반 이상을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바쳤다.

1927년 경남 거제에서 3남 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54년 만 25세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9선까지 할 정도로 정치이력은 화려했지만 박정희 유신정권과 전두환 군사 정권에 맞서 야당의 지도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가택연금에 국회의원 자리까지 뺏기는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 속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민주화를 상징하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2년간의 군사 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나라 최초의 문민정부시대를 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직후 개혁을 위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그 대표적인 현대사에 큰 영향을 준 것 가운데 하나가 군부정권의 전신인 육사 출신 엘리트 장교 모임 하나회를 없앤 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또 과거사 청산을 위한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하면서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이다.

1993년 8월 12일 처음 시행된 금융실명제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꿔놓은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기 말인 1997년 11월 22일 외환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것은 문민정부의 가장 큰 실책으로 남아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필생의 라이벌’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일각에서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관계”로 불렀을 정도였다.

민주화 투쟁 때는 한마음으로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권력을 앞에 두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맞수’였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4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군인 출신의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이후 ‘제2야당’으로 전락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전격 선언했다.

그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으로 투쟁 대상이던 군부세력과 손을 잡았지만 3당 합당은 호남 고립과 영남 패권주의 강화, 지역갈등 격화, 민주세력 분열 등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세력과 손을 잡았다. 야당 대표가 하루아침에 여당 공동대표가 됐다. 3당 합당은 호남 고립과 영남 패권주의 강화, 지역갈등 격화, 민주세력 분열 등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때부터 20여년간 계속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대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먼저 내민 화해의 악수로 종지부를 찍었다.

2009년 8월 10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 한 뒤 ‘두 전직 대통령이 화해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봐도 좋다”며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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