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유사·중복 재정사업 통폐합’

[파이낸셜투데이=이혜현 기자] 나라 살림이 어수선하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역대 최대치의 세수부족에 시름했다. 경기불황으로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매년 반복되는 정부 의 한결같은 해명이지만 정작 국민 혈세는 줄줄 새고 있다. <파이낸셜투데이>가 흥청망청 세금이 낭비되는 현장을 연중기획으로 담는다.

정부가 예산절감과 효율적인 국가지원사업 시스템 개선 등을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유사·중복 재정사업 통폐합’ 정책의 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사·중복사업으로 인정돼 통합과 감축, 폐지 등의 판정을 받은 국고보조사업에 그대로 예산이 배정되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정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안팎에서 국가재정 안정화와 국가사업 효율성 확보 등을 위해 유사·중복 재정사업 통폐합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안민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정부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인 ‘유사·중복 재정사업 통폐합’에 대한 자료를 전수 조사한 결과, 통폐합 전후의 예산 규모가 별 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예산심사 대상 55개 기관을 대상으로 통폐합 대상 사업을 조사한 결과, 올해 예산은 21조1664억원, 통폐합 후 내년도 예산은 21조897억원으로 총 767억원이 줄었다. 하지만 감소분은 대부분 사업종료에 따른 자연감소에 불과하며 ‘유사·중복 통폐합 정책과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다는 게 안 의원의 설명이다.

당초 정부는 ‘2015 업무보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통해 “600여개의 유사·중복 재정사업 통폐합을 조기달성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부가 유사·중복 사업이라고 추진한 사업은 사실상 부처 안의 과목구조개편 수준으로 통폐합이라고 분류하기에 무리가 있다.

특히 정부의 방침에도 사업 통폐합을 전혀 하지 않은 부처가 19곳에 달했다. 부처별 세부사업의 통폐합 개수를 보면 전체적으로 예산이 증가한 사업은 176개, 감소한 사업은 192개로 증감의 차이가 크지 않아 통폐합으로 인한 효과가 눈에 띄지 않았다.

안 의원은 “단순한 과목구조개편으로는 공공기관의 부채를 감축하고 방만 경영 개선을 할 수 없다”며 “일부 사업의 경우 통폐합 이후에도 세부 항목사업으로 그대로 존재해 통폐합 의미가 별로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는 유사·중복 재정사업 통폐합에 대해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며 “부채감축과 방만 경영 개선을 위해선 부처 간 협의가 선행돼야 하며 사업집행의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통폐합방식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2016년도 기획재정부 예산 검토보고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놨다.

이에 따르면 기재부는 내년 예산을 편성하면서 17개의 조세관련 사업을 유사·중복사업으로 판단해 7개로 통폐합했지만 관련 예산은 되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재부는 2015년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17개에 달하는 조세 관련 사업을 7개로 통폐합했다. 문제는 이들 7개 사업에 대한 예산이 87억5900만원으로 책정돼 당초 17개 사업에 대한 예산 요구액인 80억9900만원보다 6억6000만원이 늘어난 것이다. 사업 개수가 줄었는데 오히려 예산이 증가한 이유는 항목별로 세부 사업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몸집 불리기에만 급급해 예산 낭비와 중복 사업 집행이 심각한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도 논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예산정책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인력개발원)이 보건산업 전문인력 1만명을 양성을 위해 120억원을 들여 보건산업인재양성센터 건립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회의 심의내용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예산집행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력개발원은 2013년 해외환자 유치 등 의료서비스 글로벌화를 위한 의료통역사, 코디네이터 등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보건산업인재양성센터 매입 예산으로 150억원을 신청, 2014년 예산으로 120억원을 배정 받았다.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보건산업인재양성센터로 사용할 건물을 서울 강남 지역 이외의 부동산 가격이 저렴한 지역에서 매입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인력개발원은 국회의 예산 심의내용을 무시하고 서울 강남 소재 교육장을 무리하게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력개발원은 예산 편성 시 2020년 수요를 4만4000명으로 예상해 1500평 규모의 교육장을 매입할 계획을 수립했지만 해당 건물은 당초 계획된 수요의 절반도 채 충족할 수 없는 735평에 불과했다.

성과·실적 줄어도 예산은 더 늘어나
정부 권고에도 주머니 채우기 급급
▲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보건복지부 산하 KOHI 보건산업인재양성센터 전경.

◆유사·중복 ‘쉬쉬’

인력개발원의 해당 사업이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2009년부터 추진해 왔던 보건산업인력양성사업과 사실상 중복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인력개발원의 보건산업인재양성센터사업은 해외환자 유치가 활성화되면 이를 뒷받침할 글로벌 헬스케어 전문가 1만명을 양성하기 위한 사업으로 글로벌헬스케어와 제약, 화장, 의료기기 등의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역시 1999년부터 의료와 제약, 의료기기, 식품, 보건 등 보건산업 전문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최근 5년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해외환자유치사업을 추진하며 외국 의료 인력의 국내연수와 한국병원 체험행사, 한국의료 홍보회, 학술교류회 개최 등의 사업에 약 218억원의 예산을 집행해 왔다.

김 의원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장기간 해외환자유치 사업을 직접 추진해 왔기 때문에 산업현장에서 요구하는 시장 맞춤형 교육과정을 쉽게 발굴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반면, 인력개발원은 보건산업 현장에 대한 이해와 의학적 지식이 부족하고 교육양성과정 콘텐츠가 빈약해 진흥원의 교육과정을 베끼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인력개발원에서 추진하는 금연사업 또한 국민건강증진개발원 사업과 중복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력개발원이 금연상담매뉴얼과 보건소금연사업정보시스템 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는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추진하는 금연상담전문가교육, 금연사업 정보시스템 개발과 내용이 중복된다.

해양수산부와 그 산하기관들도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해양수산부의 해양수산생명공학기술개발 사업에 내년 예산으로 309억5800만원이 편성됐다. 이는 올해 예산보다 13.1% 증액된 금액이다. 문제는 이 사업의 성과지표 달성률이 매년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과가 부실한 사업에 이처럼 예산이 증액돼 편성되는 것은 국회의 정부부처 사업성과 평가가 예산심의에서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해양수산부 산하기관인 한국수자원관리공단이 시행하고 있는 인공어초 조성 사업도 예산낭비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윤명희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일 해양수산부 종합 국정감사에서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이 시행하고 있는 인공어초 조성 사업이 부산과 인천, 울산, 안산, 군산 등의 인공어초 사업과 유사·중복됨을 지적했다.

윤 의원은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의 인공어초 조성 사업이 여러 지자체들의 사업과 겹치는 바람에 지난해 해양수산부의 어업기반사업 예산 중 519억5300만원이 불용됐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이 수백억이 소요되는 어업기반조성 사업을 진행하면서 해당 지자체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점과 부실한 해양수산부의 사후평가에 대해서도 질타했다.

국고보조사업 운용평가에서 사업 통폐합 판정을 받았는데도 예산이 편성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생물자원 종합관리 사업은 2014년 평가에서 통폐합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내년 예산으로 46억7500만원이 배정됐다. 경력단절여성취업지원 사업과 부모 모니터링단 운영지원 사업도 통폐합 판정을 받았지만 각각 446억8300만원, 11억9200만원의 예산이 편성됐다. 강진문화복지종합타운 사업은 2014년 즉시 폐지 판정을 받았지만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5억400만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국회 심의 무시한 막무가내 식 집행
국고보조사업 운용평가 재검토 필요

◆말로만 통폐합

또 단계적 감축 판정을 받은 121개 사업 중 36개 사업은 예산이 감축되지 않거나 감축규모면에서 판정결과가 충실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청년취업진로지도 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내년 예산 165억1700만원이 편성된 이 사업은 국고보조사업운용평가 결과 단계적 감축 판정을 받아 관련 예산이 감액됐다. 하지만 신규 내역사업 신설을 통해 결과적으로 185.6% 예산이 증액됐다.

윤철한 경실련 시민권익센터팀장은 “국고보조사업 운용평가제도의 목적은 불필요하거나 재정지원규모가 과다한 사업을 선별해 재정건전성을 높이는 것에 있다”며 “공염불 정책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통폐합·감축·폐지 판정을 받은 보조사업의 필요성과 실효성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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