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바라보는 親日기업의 ‘주홍글씨’

[파이낸셜투데이=이혜현 기자] 1924년 설립된 삼양그룹은 국내 대표 장수그룹이다. 창업주는 고 김연수 회장으로 동아일보 창업자인 인촌 김성수의 동생이다. 고 김연수 회장은 일제시대 때 고위관료를 지낸 자본가로 1924년 삼양그룹의 전신인 삼수사를 세웠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군수사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삼양그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수기업이지만 친일기업이라는 오명으로 세간의 눈총을 받고 있다.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은 창립 91주년을 맞아 선택과 집중에 초점을 맞춘 사업재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양그룹은 제당사업과 화학섬유사업, 의약사업에 이어 최근에는 요식업과 식품사업에도 진출하며 3~4차례 굵직한 변화를 시도했고 그 결과 비교적 무난하게 사업부문 확장에 성공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룹의 주력사인 삼양사와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가 실적 악화를 면치 못하며 그룹 곳곳에서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실적 위기

삼양그룹은 1955년 제당사업, 1969년 폴리에스테르 섬유산업을 시작했다. 이후 화학, 식품, 의약바이오, 산업자재, 용기, 무역부문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김 회장은 앞으로 100년 더 지속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천명하며 2010년부터 그룹 재정비에 착수했다. 삼양그룹의 사업재편 흐름의 중심에는 삼양사가 있다.

식품 사업 부문을 맡고 있는 삼양사는 삼양그룹의 전체 매출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계열사다. 삼양사의 주력 상품은 설탕과 밀가루, 식용유 등이다.

삼양그룹은 삼양사의 ‘큐원’이라는 식품 브랜드로 소비자들에게 주로 알려져 있다. 주력 계열사인 삼양사가 국내 설탕시장의 30%를 차지하는 과점적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올해 상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삼양사의 매출은 6548억원으로 전년동기(6837억원) 대비 4.2% 줄었다. 영업이익 역시 327억원에서 234억원으로 28.6% 감소했고 당기순이익은 283억원에서 158억원으로 44.2% 급감했다.

이같은 삼양사의 실적난항은 정부가 당류 저감화 정책을 펴면서 국내 설탕 소비가 전반적으로 감소한데다 메르스 영향으로 매출이 시원치 않았던 것이 주요인으로 파악된다.

삼양그룹의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도 실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삼양홀딩스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1조457억원으로 전년동기(1조1238억원) 대비 7.0% 감소했다. 영업이익 역시 500억원에서 476억원으로 4.5% 줄었다.

외식사업 부문을 그룹의 중추사업으로 키우겠다는 김 회장의 계획 역시 크게 어긋나고 있다.

삼양그룹은 2006년 레스토랑 세븐스프링스를 인수해 공격적인 경영전략으로 몸집을 키워왔지만 적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현재 삼양그룹의 외식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는 삼양에프앤비다.

창립 91주년 맞은 국내대표 장수기업
계열사 실적 ‘빨간불’…먹구름 청사진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삼양에프앤비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은 561억원으로 전년동기(501억원) 대비 11.9% 증가했다. 외형적인 성장은 이뤘지만 내실은 다지지 못했다. 지난해 무려 31억6820만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이는 전년동기(7억6000만원) 대비 무려 316.9% 급증한 수치다. 이밖에 31억2926만원의 당기순손실은 전년동기 대비 291.3% 증가한 것이다.

외식산업의 경우 4분기에 매출이 크게 늘어나는 경향이 있지만 3분기까지 누적된 손실을 한 번에 털어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돼 2년 연속 적자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히 공격적 출점전략이 발목을 잡힌 것이 악재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삼양그룹은 당초 2015년까지 매장 수를 50개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세븐스프링스의 현재 점포수는 26개 매장과 세컨드브랜드 형식인 카페세븐스프링스 3개점이 전부다. 대기업 계열 음식점에 대한 출점제한 권고가 내려진 가운데 올해 안에 점포를 20개 이상 늘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삼양그룹 측은 “세븐스프링스 외에 패밀리레스토랑 브랜드 대부분 실적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며 “1인 가구가 늘면서 수요가 감소했고 한식뷔페가 유행하는 등 여러 요소가 겹치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결과로 본다”라고 분석했다.

삼양그룹의 계열사들의 실적이 줄줄이 낙제점을 맞은 가운데 의약 사업부문을 맡고 있는 삼양바이오팜이 그나마 선전했다. 지난해 삼양바이오팜의 매출은 572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12.9%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3억265만원에서 5억3711만원으로 77.5% 증가했고 당기순이익은 42억원에서 149억원으로 무려 255.2% 급증했다.

◆그룹의 변신

삼양그룹은 화학과 식품, 의약 등 핵심 사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장 동력을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2011년 8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수십년 간 이어져온 삼양그룹 구조가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등 삼양그룹 오너 일가가 삼양홀딩스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삼양그룹은 이에 따라 계열사인 삼양사를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와 사업회사인 삼양사(화학·식품), 삼양바이오팜(의약) 등 3개 회사로 인적, 물적 분할하며 사업을 재정비 했다. 동시에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도 정리했다. 그 일환으로 36년에 걸쳐 육성해 온 사료사업 부문을 이지바이오에 양도했다. 오랜 기간 공을 들인 사업이지만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사업 부문을 과감하게 쳐낸 것이다.

삼양홀딩스는 지주회사 역할을 하며 사업회사인 삼양사와 화학부문 계열사인 삼남석유화학·삼양화성·삼양EMS·삼양이노켐·삼양공정소료상해유한공사·삼양EP헝가리를, 식품부문 계열사인 삼양제넥스·삼양밀맥스·삼양웰푸드·세븐스프링스·삼양F&D·진황도삼양제넥스식품유한공사를, 의약부문 계열사인 삼양바이오팜 등을 자회사로 뒀다.

삼양그룹은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증대시키고 사업부문별 전문화를 통해 책임경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주요 과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2010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앞서 삼양그룹은 글로벌 R&D 혁신기업으로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2015비전을 발표했다. 2015년까지 화학, 식품, 의약의 3대 핵심사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혁신을 통한 차별화로 강력한 시장 리더십을 확보하며,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구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지워지지 않는 ‘반민족행위자 창업주’
兄弟경영에서 사촌경영 세습 미래는?

삼양그룹은 창업주인 고 김연수 회장의 3남 고 김상홍 명예회장과 5남 김상하 회장이 기업을 성장 궤도에 안착시킨 ‘형제 경영’이 ‘사촌 형제간 경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삼양그룹은 사촌지간인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김량 삼양홀딩스 부회장, 김원 삼양홀딩스 부회장 등 3인이 참여하는 최고경영회의를 통해 그룹의 중장기 사업 방향을 정하고 투자 결정이나 경영 혁신 등 주요 결정을 내리고 있다. 오너 3세 체제의 중심에는 김상홍 명예회장의 장남인 김윤 회장이 있다. 김윤 회장은 차분한 스타일인 아버지와 달리 활동적이며 언변이 뛰어난 달변가로 정평이 나 있다.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의 최대 주주는 2015년 6월 30일 기준 5.42%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김원 삼양홀딩스 부회장이다.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과 김량 삼양홀딩스 부회장이 각각 4.82%, 3.57%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친일 꼬리표

▲ 故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

삼양그룹은 100년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친일기업 논란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창업주인 고 김연수 회장이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김 창업주는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에 수록돼 있다. 그의 친일 행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경성방직을 기반으로 군수 산업에 뛰어들었다. 일제로부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9년 경성부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라는 관직까지 수여 받았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일제의 전쟁 지원을 위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 김 창업주는 친일파로 지목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심판대에 섰지만 1949년 재판에서 결국 무죄를 받았다. 당시에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김 창업주의 항변이 정상참작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내지 못했다. 2009년 대통령 직속 기구로 결성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위)는 김 창업주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한데 이어 2010년 2월 친일행위로 인해 축적한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그 결과 김 창업주가 보유했던 전북 고창군 땅 약 1만㎡(약 3030평)이 국가에 귀속됐다.

김 창업주의 후손들은 즉각 반발하며 친일반민족위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일제의 식민통치에 가담했다는 김 창업주의 항변으로 친일행위를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봤다. 또 김 창업주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받은 재산을 몰수한 친일반민족위의 결정이 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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