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푸닥거리에 누더기 되는 길바닥

[파이낸셜투데이=이혜현 기자] 나라 살림이 어수선하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역대 최대치의 세수부족에 시름했다. 경기불황으로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매년 반복되는 정부 의 한결같은 해명이지만 정작 국민 혈세는 줄줄 새고 있다. <파이낸셜투데이>가 흥청망청 세금이 낭비되는 현장을 연중기획으로 담는다.

연말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엎어 교체하는 일이 연례행사로 굳어진지 오래다. 이는 지자체가 다음해 예산으로 중앙정부로부터 더 많은 지방교부금, 국가 보조금을 받기 위해 하반기로 갈수록 ‘불용예산 없애기’에 열을 올리는 탓이다. 남아도는 예산을 없애기 위해 없는 사업도 만들어 돈을 써버리는 행태도 서슴지 않는다. 통행에 불편을 겪는 시민들의 고충이나 새해 예산을 더 받아내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혈세낭비에만 열을 올리는 지자체들의 방만한 예산운영은 늘 골칫거리다.

◆심심하면 갈아엎어

지난달 제주시가 보도블록 포장재 파손 등을 이유로 성수기임에도 정비작업을 밀어붙여 관광객들과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가득이나 메르스로 인해 줄어든 관광객이 점점 회복세를 보일 때 제주시가 관광객과 시민들의 불편과 안전을 도외시하고 제주시 연동 신광로 일대에 보도블록공사를 강행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다시 찾는 관광객들로 극복되는 분위기에 제주시가 막무가내 공사로 찬물을 끼얹었다고 성토했다.

제주시는 “보도포장재 곳곳에 패임현상이 발생해 통행에 불편을 주고 무분별하게 설치돼 경관을 해치는 조형물을 정비하기 위해 해당 공사가 불가피 했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의 말은 달랐다. 시가 밝힌 불편구간은 몇 군데에 불과하고 보행하기에 불편하거나 위험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주먹구구식 행정도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16일 제주시 일도2동 연삼로 인도에 설치된 차량 진입방지 말뚝인 볼라드가 당초 목적인 보행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되레 안전을 위협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자 이를 제거, 재설치 하면서 혈세낭비가 지적되고 있는 것. 지난 3월 처음 설치된 볼라드는 충격 흡수용 고무재질로 자전거 도로와 인도 위에 3m 간격으로 설치됐지만 너무 촘촘해서 통행에 방해가 되고 자전거도 다닐 수가 없었다.

제주시 도남동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 주위의 인도와 횡단보도 앞에는 네모반듯한 화강암을 볼라드로 설치해 충돌 시 큰 부상의 위험성도 있었다. 특히 반사표지도 없어서 야간에는 시민들이 걸려 넘어지거나 부딪히는 등의 안전사고도 잇달았다.

관련법에 따르면 볼라드는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설치하되 충격을 흡수하는 재질을 이용해야 하는데 제주시는 이 기준을 준수하지 않았다. 제주도감사위원회 감사 결과, 도내에 설치된 볼라드 1804개 가운데 76%인 1375개가 규정에 맞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현재 서귀포시는 5000만원의 예산을 책정해 부적합 볼라드를 철거·교체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재설치 비용은 개 당 20만~40만원으로 애꿎은 예산만 낭비한 셈이다.

이처럼 관련 규정을 어기거나 부적합 볼라드가 우후죽순 들어선 것은 통합관리 부서가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제주시는 26개 읍·면·동을 비롯해 도로관리와 자전거, 주차관리 등 각 부서별로 제각기 공사를 발주하고 있다.

부적합 볼라드에 대처하는 자세도 행정시별로 제각각이다. 서귀포시는 부적합 볼라드 철거 및 재설치에 따른 별도의 예산 항목을 만들어 5000만원을 책정한 반면 제주시는 부적합 볼라드를 비롯한 과속 방지턱, 방호벽, 정비선 등 도로 시설물 보수·정비 예산을 모두 묶어 5000만원을 책정했다. 사업 우선순위 없이 뭉뚱그려 예산을 잡다보니 올해 안에 몇 개의 부적합 볼라드를 철거 또는 교체할 수 있을 지 예상할 수 없다. 도내 부적합 볼라드 1375개 중 무려 1100개가 제주시 지역에 설치돼 있다.

제주시 ‘설치하고 뽑아내고’ 주먹구구 행정 눈총
화강석, 영구 사용할 수 있는데도 마구잡이 교체

제주시 관계자는 “볼라드 시설 기준이 2006년 무렵 마련되다보니 그 이전에 설치한 볼라드는 정해진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다”며 “횡단보도와 자전거도로 공원 등 다양한 곳에 볼라드가 설치되기 때문에 통합관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명했다.

청주시도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엎어 예산낭비를 한다는 비난 세례를 받고 있다. 청주시는 올해 안으로 10억4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기존 보도블록 교체공사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청주시 흥덕구에 보도블록 교체·보수 3건에 1억4000만원, 긴급 보수 명목으로 6000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그 밖에 서원구 4억4300만원, 상당구 2억1200만원, 청원구 1억5000만원 등 수억원의 혈세를 들여 공사를 하고 있다.

해마다 시내 여기저기서 멀쩡한 보도블록을 교체·정비하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혈세 낭비지적과 함께 시민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이 지속됨에도 시 당국은

보도 교체 보수를 위한 시설물 내구연한 기준 마저 마련해 놓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도블록이 전부 걷어진 탓에 정작 통행로를 잃은 시민들이 차량이 주행하고 있는 도로 위를 걷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진 곳도 있었다. 춘천시는 지난 6월 보행 안전 및 편의 증진을 위해 총 사업비 3억2000만원을 들여 퇴계동에 위치한 먹자골목 행촌삼거리~한성아파트 앞 사거리와 온의사거리~행촌삼거리, 행촌삼거리~우성아파트 앞 등 총 1.9㎞에 이르는 보도를 정비하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 과정에서 보도의 상·하행이 동시에 공사가 이뤄지면서 불가피하게 시민들이 도로로 보행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시민들이 보행에 불편을 겪는 것은 물론 교통사고 위험에 그대로 노출됐다. 청주시는 또 영구 사용이 가능한 화강석을 보도블록으로 설치했음에도 50%를 신규로 교체하면서 예산 낭비의 비난을 자처했다.

◆고질병 해결비법은

진천군이 지난 6월 종합정비사업 일환으로 추진하는 생거진천거리 가로경관 정비 사업을 놓고도 예산낭비 의견이 분분하다.

진천군이 진천읍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새로 발주한 가로경관 정비 사업이 예산낭비는 물론 통행불편 등을 초래한다면서 주민들이 집단민원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사업비 17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인도 보도블록 교체와 아스콘 절삭포장 등 도시미관을 정비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것이 군 관계자의 설명이지만 멀쩡한 보도블록 세금을 투입해 교체한다는 주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

진천군청 관계자는 “2011년부터 시작된 진천읍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은 올해 준공을 목표로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꾸준히 진행돼 온 국가사업으로 일부에서 지적하는 예산낭비 사업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진천군 주민들은 이에 대해 “통행하기에 불편하지도 않고 아직 더 사용할 수 있는 보도블록을 굳이 돈을 들여 왜 교체하려는 것 인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서 상인들은 영업에 지장을 받고 있고 주민들은 통행에 불편을 겪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수원시도 무분별한 보도블록 정비 공사로 몸살을 앓았다. 지난 5월 영통구는 총 3억원의 예산을 들여 기존 보도블록의 노후 등을 이유로 영통역 3번 출구부터 서천사거리까지, 매탄1동 동남빌라부터 수원남부경찰서까지 보도블록 정비·교체공사를 진행했다.

팔달구도 3억3000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도청오거리에서 교동사거리, 동수원병원부터 가산삼거리의 보도블록 교체공사를 했다. 그밖에 장안구 3곳, 권선구 4곳에서 기존 설치된 보도블록의 노후나 파손 등을 이유로 수억원에 달하는 혈세를 들여 공사를 했다.

마지막 몰빵 집행, 불용예산 주인없는 돈 전락
서울시 ‘10계명’으로 60년간 이어진 폐단 근절

이처럼 해마다 수원시내 여기저기서 멀쩡한 보도블록을 갈아치우다 보니 보도블록 공사기준과 예산낭비 방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인근 천안시는 연말마다 불거지는 예산낭비·행정 불신 해소를 위해 보도블록 수리·교체 이력을 기록하는 ‘보도블록 이력제’를 올해부터 실시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천안시의 보도블록 이력제는 10년 이내 보도공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부득이한 공사는 관련 심의를 거치도록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천안시 관계자는 “보도블록 유지 수리비로 한해 평균 3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곳만 정비하고 중복 사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보도블록 이력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도블록 10계명

서울시도 무분별한 보도블록 정비사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서울시 보도블록 10계명’은 누가 공사를 했는지 이름을 밝히는 ‘보도공사 실명제’와 부실 공사시 최대 2년간 입찰을 제한하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 11월부터 2월까지 보도블록 공사를 금지하는 ‘CLOSE 11’ 등이 주요내용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는 2012년부터 이른바 서울시 보도블록 10계명을 만들어 지난 60년간 관행처럼 굳어져 온 예산 낭비성 보도블록 공사의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시가 한해 보도블록 공사비용으로 책정하는 예산 60억원인데 25개의 각 자치구에서 쓰는 돈이 2~3억원 가까이 된다”며 “25조원에 이르는 서울시 총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자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지만 국민 혈세를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관련 지침을 강화하고 엄격히 감시·감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실시한 보도공사 관련 시민만족도 조사 결과, 보도블록 10계명 발표 이후 보도공사 만족도는 78%까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보도공사 실명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등이 높게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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