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멧돼지, 사슴 그리고 봉황까지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민족 대명절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족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인 만큼 화투를 빼놓고 얘기하긴 힘들다. 명절에 식구들 끼리 삼삼오오 둘러 앉아 ‘판’을 벌이는 광경이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투패의 유래와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준비했다. 화투에 숨겨진 비밀을 샅샅이 파헤쳐 보자.

화투의 유래는 16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포르투갈과 활발히 무역을 하던 시절, 포루투갈 선교사가 ‘포루투갈식 트럼프’를 들여왔다. 사람들은 단속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 넣었고 이것이 화투패가 됐다. 화투놀이를 흔히 ‘동양화 감상’이라고 표현하는 까닭도 단속을 피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화투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대략 조선 후기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작성된 문헌에 ‘이미 화투놀이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화투패는 4장씩 12종류로 총 48장으로 구성돼 있다. 1년, 12개월을 뜻하는 것으로 ▲1월 소나무 ▲2월 매화 ▲3월 벚꽃 ▲4월 등나무 ▲5월 꽃창포 ▲6월 모란 ▲7월 싸리 ▲8월 억새 ▲9월 국화 ▲10월 단풍 ▲11월 오동나무 ▲12월 버들을 의미한다. 모두 일본 고유의 세시풍속과 축제, 행사, 풍습, 선호, 기원의식 등에 착안한 것이다.

1월 송학 소나무+학

속칭 ‘삥’이라 불리는 송학은 1/4쪽 짜리 태양과 1마리의 학, 소나무, 홍단 띠로 구성됐다. 태양은 신년의 일출을, 학은 장수와 가족의 건강에 대한 염원을 나타낸다. 소나무는 일본의 세시풍속인 ‘가도마쯔’ 행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2월 매조 매화+꾀꼬리

2월에 해당하는 매조엔 매화와 꾀꼬리가 나온다. 일본의 매화축제가 2월에 시작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매화와 꾀꼬리는 일본어로 각각 ‘우메’와 ‘우구미스’로 표기된다. 운을 일치시키려는 과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꾀꼬리는 일본에서 한국의 까치와 같은 친숙한 새다.

3월 벚나무 벚꽃+만막

일본의 벚꽃 축제는 3월에 절정을 이룬다. 삼광의 벚꽃 밑에 그려진 것은 ‘만막’이라는 일종의 천막으로 일본인들이 경조사 때 실제로 사용한다.

4월 흑싸리 등나무+두견새

4월 화투 문양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흑싸리로 오해하지만 사실 등나무 꽃이다. 4월은 일본에서 등나무 꽃 축제가 열리는 시기다. 두견새 역시 일본에서 시제로 자주 등장할 만큼 친숙한 새다.

5월 난초 붓꽃+목재다리

5월 화투문양도 난이 아닌 붓꽃이다. 붓꽃은 보라색 꽃이 피는 습지의 관상식물이다. T자 모양의 막대와 3개의 작은 막대기는 붓꽃을 구경하기 위해 정원 내 습지에 만든 산책용 목재 다리와 버팀목이다.

▲ 월별로 분류된 화투패.

6월 모란 모란꽃+나비

6월 화투 문양 모란꽃은 고귀한 이미지로 일본인들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꽃과 나비하면 모란꽃을 떠올릴 정도로 동양 사회에선 모란꽃을 ‘꽃의 제왕’으로 쳐준다. 다만 한국화에선 관례상 모란과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는다.

7월 홍싸리 싸리나무+멧돼지

7월 화투 문양은 싸리나무다. 싸리나무는 녹색이지만 화투패엔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처리돼 있다. 이는 화투 제작자의 단순 실수로 추정된다. 멧돼지가 등장하는 이유는 근대 일본에서 성행했던 멧돼지 사냥철이 7월이었기 때문이다.

8월 공산 산+기러기

8월 화투 문양엔 산과 보름달, 기러기가 등장한다. 이는 8월이 일본에서 달구경의 계절인 동시에 기러기가 대이동을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검은색은 산, 흰색은 하늘을 의미한다.

9월 국준 국화+술잔

화투놀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9월패를 가장 좋아할 것이다. 9월은 일본에서 국화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계절이다. ‘쌍피’가 포함돼 있는 달이기도 하다. 일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국화주를 마시면서 자신들의 권세와 부귀가 영원하길 기원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풍 단풍나무+사슴

일본에서 10월은 전통적으로 단풍놀이의 계절인 동시에 본격적인 사슴사냥철이다. 수사슴과 단풍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슴을 의미하는 ‘시카’와 단풍을 뜻하는 ‘카에데간’에도 말운과 두운이 일치한다.

11월 오동 오동잎+봉황

오동은 가장 각광받는 화투패다. 속칭 ‘똥광’으로 불리는 오동의 광은 광으로도 쓸만하고 피 역시 오동만이 유일하게 3장이다. 오동패에 등장하는 닭 형상의 조류는 바로 봉황새의 머리다. 오동잎은 일왕보다도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막부의 쇼군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11월패가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오노의 전설'을 모티브로한 비광.

12월 비 선비+개구리

절기상으로 12월은 추운 겨울이다. 하지만 패를 자세히 보면 겨울과는 거리가 멀다. 겨울잠에 들었어야 될 개구리가 올라와 있으며, 선비는 여름양산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오노의 전설’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비 광에 등장하는 선비의 모습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오노가 붓글씨에 몰두하다 싫증이 나자 머나먼 방랑길을 떠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오노는 수양버들에 기어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개구리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공부에 정진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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