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북녘 땅 고향, 명절마다 사무쳐

[파이낸셜투데이=이혜현 기자]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가족, 친지들과 함께 즐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전국 곳곳이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귀성객들로 북새통을 이뤄도 이들에게는 그저 딴 세상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고 자란 곳을 뒤로하고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은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쓸쓸한 추석을 보내고 있다.

시끌벅적한 추석연휴로 온 나라가 들떠 있을 때 탈북자들은 북에 남아있는 혈육들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시간을 보낸다. 자신의 처지와 정 반대인 주변 풍경들은 그들을 더 아프게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3월 기준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입국 인원은 2만7810명에 이른다.

◆가깝지만 먼

▲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

탈북자 1호 국회의원인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은 남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북한의 대표적인 엘리트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정무원 건설부장을 지낸 관료였고 어머니는 대학교수 겸 러시아어 번역가였다.

조 의원은 김일성 일가와 장·차관들의 자제들만 다닌다는 평양남산학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생인 김평일과 함께 공부했다. 이후 북한 최고 명문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교 자동조종학과에 입학했고 경제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자마자 경제학부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조 의원은 1993년 중국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학의 교환교수로 지내면서 자유가 없는 북한 사회와 김정일 정권에 회의를 느꼈고 결국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정권)은 노동신문 2개면에 실린 김일성 신년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게 할 정도로 강압적인 체제였다”며 “이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결국 부모와 형제, 처자식을 뒤로하고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조 의원은 남한에 정착한 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 통일교육연구원장 직을 거친 후 2012년 19대 총선에서 탈북자 1호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 체제의 실태를 자세히 알고 있는 조 의원은 북한 주민 인권 개선과 탈북자 정착 문제를 중심으로 의정 활동을 하고 있다.

조명철, 탈북자 1호 국회의원 당선
구속 수감 한명숙, 파란만장 인생사

 

▲ 한명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대한민국 1호 여성 국무총리’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명숙 전 의원은 1944년 평양 신양리에서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친은 평양시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고 모친은 평양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했다. 한 전 의원이 5살 때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고, 두 번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됐다. 남쪽에서의 생활은 녹녹하지 않았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전 의원은 오히려 어린 시절의 가난이 자신을 강하게 키웠다고 회상했다.

한 전 의원은 1963년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기독교 연합서클인 경제복지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를 만나 1967년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6개월 만에 박 교수가 신영복 교수 등과 함께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13년간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이때부터 한 전 의원의 재야운동이 시작됐다.

1974년에는 크리스천아카데미 여성분과 간사를 맡으면서 여성 인권운동에도 앞장섰고 이로 인해 1979년 이른바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이 터져 2년간 복역했다. 석방 후에는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이끌며 재야 운동에 더욱 열중했다. 이때 고 김대중 대통령과 맺은 각별한 인연은 정계 입문의 가교역할을 했다.

한 전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2001년 초대 여성부장관, 2003년 환경부 장관을 거쳐 2006년 여성 최초로 제37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하지만 한 전 의원은 총리직에 있던 2007년 초 한 건설업체 대표로부터 9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으면서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은 국무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고 구치소에 수감됐다.

◆입지전지적 오너들

▲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재계에도 고향인 북한에 가족과 친인척을 두고 수십 년 간 남한에서 기업을 일군 오너들이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표적이다. 지난 2001년 타계한 정 명예회장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에서 1915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네 번의 가출을 시도한 끝에 서울로 상경한 후 각종 사업에 뛰어 들며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

정 명예회장은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면서 사업에 첫 발을 디뎠다. 이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자동차사업에 나섰다. 정 명예회장은 1947년 건설업을 위해 설립한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1950년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만들었다.

1971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정 명예회장은 그룹을 매출액 80조원 종업원 20만명 이상의 규모의 기업으로 일궈냈다. 정 명예회장은 1987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해 제14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 연달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대북산업으로 눈을 돌렸다. 1998년 정 명예회장은 85세의 고령에도 직접 소떼를 끌고 방북하며 남북경협 대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이것이 정 명예회장의 마지막 신화였다. 정 명예회장은 2000년 5월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이듬해 3월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아호를 고향 마을인 아산리에서 따와 아산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고향에 대해 각별한 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남북경협의 서막 연 故 정주영 회장
반년사이 3번 탈북한 박승복 샘표 회장

 

▲ 故 이회림 OCI그룹 명예회장

태양광 전문기업 OCI그룹의 창업주 고 이회림 명예회장은 1917년 개성 만월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숱한 우여곡절을 거친 그는 1945년 광복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했다. 1968년 인천 남구 학익동 앞바다 80만평을 매립한 후 화학공단을 조성했다. 40년간 이 명예회장은 오로지 화학업종에만 집중하며 동양제철화학과 유니드, 삼광글라스의 회사를 설립했다.

이 명예회장의 한 우물 경영은 OCI그룹이 자산총액 12조원대의 재계 서열 20위 기업으로 도약하는 성과를 낳았다.

이 명예회장은 일본인이 약탈해 간 고미술품 수집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겸재 정선 노송영지도를 비롯해 김홍도·김정희·장승업·흥선대원군 등의 작품이 그의 손을 통해 국내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그가 사회에 환원한 총액은 430억원에 이른다.

▲ 박승복 샘표 회장

박승복 샘표 회장은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함흥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박 회장의 부친은 고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주다. 박 회장은 해방 직후 혈혈단신으로 꼬박 1주일 간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하지만 두 달 뒤 다시 월북해 부친을 설득해서 남한으로 내려왔고 이듬해 3월에는 6남매를 데리고 월남했다. 반년 사이 38선을 3번이나 넘나든 것. 그의 나이 24살 때 일이다.

올해 93세인 박 회장은 고령의 나이에도 2010년까지 손수 회사경영을 챙기면서 일선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1997년 아들인 박진선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줬지만 매일 본사로 출근하며 업무를 살피곤 한다. 박 회장은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한국식품공업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고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은 한국 낙농업의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 故 김복용 매일유업 명예회장

1920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함남 북청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단신으로 월남했다. 실향민 특유의 억척스러움에 납기일, 품질 약속을 꼭 지킨다는 평판을 바탕으로 사업을 늘려갔다. 김 회장은 제분업과 해외 무역으로 제법 큰돈을 벌어 1956년 공흥산업주식회사, 1964년 신극동 제분주식회사를 경영해 오다 1969년 매일유업의 전신인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를 인수했다.

이후 김 회장은 정부와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전국의 황무지를 초지로 개간하고 우량 젖소를 도입, 낙농가를 육성해 한국 낙농산업 기반의 초석을 다졌다. 김 회장은 국내 낙농산업 발전과 축산 진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6년 농림부장관 표창, 1978년 동탑산업훈장, 1999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김 회장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선진국의 신제품 동향을 둘러보기 위해 수시로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외 출장을 떠나는 등 노익장 경영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 컵커피시장을 개척한 ‘카페라떼’도 그가 직접 발굴한 작품이다.

▲ 故홍두영 전 남양유업 회장

◆외길 인생, 하지만…

유가공업계에서 매일유업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남양유업의 창업주 고 홍두영 명예회장도 이북출신이다. 한국 낙농업의 대부라고 불리는 홍 명예회장은 1925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해 1964년 지금의 남양유업을 세웠다. 2010년 영면하기까지 46년을 불모지 같았던 한국 낙농산업을 개척하고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 위한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홍 명예회장은 “우리 기술로 직접 분유와 우유를 생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우유와 조제분유, 발효유, 치즈, 커피, 음료 등 200여가지 히트 상품들을 쏟아냈다. 실속 경영 속에 승승장구하며 2009년 연매출 1조원대를 달성했던 남양유업은 2013년 ‘갑질’ 파문을 겪으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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