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

[파이낸셜투데이=부광우 기자] 입시, 취업, 결혼, 출산. 삶의 과정들일 뿐이지만 남 눈치에 유난히 신경 써야 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이들은 일종의 관문이 됐다. 점점 높아지는 난이도에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추석은 억지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해야만 하는 힘겨운 시간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취업문만 두드리고 있는 ‘백수’ ‘백조’들에게 명절은 가장 피하고 싶은 날이다. 학창 시절 친척 어른들이 ‘크게 될 놈’이라며 호탕하게 건네던 덕담과 위로는 어느새 걱정 어린 시선과 질타로 변해 있다. 여기에 다른 가족들 중 누군가가 취업에 성공하기라도 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주위를 에워싼다.

◆올해도 나홀로

휴학도 모자라 ‘논문 미제출 꼼수’까지 써 가며 대학 졸업을 미루고 3년 째 ‘취준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최모(30)씨는 결국 올해 추석 귀향을 포기했다. 초·중·고등학교 내내 친척들 사이에서 비교의 대상이 돼 왔던 사촌 여동생이 결국 올해 상반기 최씨보다 먼저 취업문 열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난 설까지만 해도 일가친척들의 눈치를 나눠 받으며 동병상련을 느꼈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뒤바뀐 지금, 이제 그 불편한 눈길은 최씨에게 집중될 것이 뻔했다.

최씨는 “취준생에게 명절은 1년 중 가장 괴로운 날이다.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라는 명분에 담긴 측은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다”며 “청년실업이 심각하다는 말부터 시작해 자기가 내 나이 때는 어땠다는 어른들의 레파토리를 듣고 나면 그저 도망치고 싶은 기분 뿐”이라고 토로했다.

최씨처럼 아직 명절 귀향을 두고 마음 쓰는 사람은 취준생 사이에서 ‘초보’로 통한다. ‘취업 장수생’이자 4년 째 명절에 고향을 찾고 있지 않는 김모(32)씨는 이번 추석에도 ‘단기 알바’ 자리를 일치감치 찜해뒀다. 추석 내내 친척들의 눈길을 피하는 것은 물론, 상대적으로 명절 알바 시급이 훨씬 ‘쎄기’ 때문에 김씨와 같은 취준생으로서는 일석이조다.

실제로 아르바이트 전문포털 알바천국이 추석을 앞두고 지난 15~18일 남녀 143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취업준비생 38.3%가 올 추석에 고향에 가지 않고 알바를 할 계획이라는 답을 내놨다. 특히 명절에 알바를 하는 이유로 ‘경제적 사정 때문에(23.1%)’라는 답과 함께 ‘단기고수익 기회(23.1%)’ ‘친척을 만나기 싫어서(14.1%)’ 등이 꼽혀 현 세태를 읽게 했다.

김씨는 “장수 취준생들에게 명절은 그저 단기 고수익 알바의 기회가 된지 오래”라며 “명절 분위기도 잊은 지 오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취준생의 눈치 보이는 명절, 멀어지는 고향
결혼…출산…이어지는 압박에 마음엔 ‘피멍’

취업문을 통과했다고 맘 편히 명절을 즐길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사실 진짜 관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입시가 ‘지역예선’, 취업이 ‘조별예선’이라면 결혼부터는 본격 ‘토너먼트’다.

당당히 국내 10대 그룹 본사에 입사한 박모(34·여)씨는 이번 명절부터 다시 귀향을 멈출 생각이다. 4년 전 중소기업에라도 취직하라는 친척들의 우려를 이겨내고 우여곡절 끝에 만족스런 직장을 찾았지만, 이제는 이어지는 친지들의 ‘결혼 훈수’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취준생 시절 2년 간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다가 입사 후 귀향을 ‘재개’했지만 올해부터 다시 발길을 끊을 예정이다.

박씨는 “취업 준비를 할 때는 내가 부족한 것이니 더 노력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어른들의 우려를 격려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생각도 없고 짝도 없는데 계속되는 결혼 압박은 아무리 마음을 좋게 먹어도 스트레스일 뿐”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박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지난달 27일부터 이번달 9일까지 전국 30대 미혼남녀 4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이들의 83.8%가 ‘명절이 두렵고 부담스러운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부모님이나 친지의 잔소리 때문’이라는 답이 압도적이었다.

결혼 다음엔 아이다. 일부러 피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2세를 원하지만 생기지 않는 불임부부들도 명절은 피하고만 싶은 날이다. 더욱 괴롭고 억울한 건 여자 쪽이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인식 탓에 불임은 알게 모르게 여자 책임이 되곤 한다.

결혼 5년차인 직장인 이모(32·여)씨도 이같은 케이스. 결혼 초반 4년 동안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독촉이 시작됐고 이씨 자신도 슬슬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해 겨울 남편을 힘들게 설득해 찾아간 불임클리닉에서 남편의 정자 수가 부족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나친 과음과 흡연에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정자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불임의 원인은 이씨의 남편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씨의 남편은 영업직 사원으로 야근과 외근, 술자리를 달고 살았다. 소위 ‘술상무’였던 것. 하지만 화살은 고스란히 이씨에게 쏠렸다. 시어머니는 진단 결과를 듣자마자 “내조를 얼마나 엉망으로 한 거냐. 내 아들이 얼마나 건강한 애였는지 아냐”며 버럭 화를 냈다.

◆가슴에 대못질

지난 설에도 시어머니의 따가운 눈살을 견뎌내기 힘들었던 이씨는 올해 추석이 다가오면서 찾아온 불안 증세에 병원까지 가 안정제 처방을 받아 왔다. 아직도 지난 설 “지금 돈이 문제냐” “하루라도 빨리 낳아 길러야지” “쟤는 뭘 믿고 저리 태평하니” 등 시댁 식구들이 나누던 험담이 귀에 맴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불임진료 환자 수는 2010년 18만6027명, 2011년 19만3355명, 2012년 19만1918명, 2013년 19만1599명, 2014년 21만1184명 등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높아진 결혼 연령에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합쳐졌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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