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은둔의 제왕’

[파이낸셜투데이=한종해 기자] ‘삼성가 장남’ 이맹희 씨가 세상을 떠났다. 폐암 2기 진단을 받은 지 2년8개월만이다. 그는 마지막을 중국 베이징에 소재한 한 병원의 병상에서 맞았다. 국내 1위 재벌사 총수의 형이자, 15위 재벌사 총수의 아버지라는 화려한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외로움 죽음이다. 인생의 9할을 ‘은둔의 제왕’으로, 그리고 고작 1할을 ‘삼성가 황태자’로 살다 간 맹희 씨의 굴곡진 인생사를 들여다봤다.

전 제일비료 회장, 이맹희(84) 씨가 14일 중국에서 별세했다. 맹희 씨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이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부친이다. 형제자매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외에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등이 있다.

CJ그룹 관계자는 “이맹희 전 회장이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현지시간 오전 9시39분 별세했다”고 밝혔다.

맹희 씨는 2012년 12월 폐암 2기 진단을 받고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암이 부신(콩팥 위에 있는 내분비 기관) 등으로 전이돼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았고 2014년에는 암세포가 혈액을 통해 림프절로 전이되면서 다시 중국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아왔다. 최근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머물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한 때 그룹 총수

‘삼성가 장남’의 부고가 전해지자 국내·외 언론과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맹희 씨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2012년 2월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거액의 차명 상속재산 반환소송을 제기한 지 3년6개월여만이다. 그 전에는 더 했다. 간혹 친자확인 소송, 양육권 소송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을 뿐이다. 그는 인생 대부분을 세상일을 피해 숨어 살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맹희 씨는 한 때 삼성그룹을 진두지휘하는 ‘황태자’였다.

맹희 씨는 1931년 이병철 창업주와 부인 고 박두을 씨와의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맹희 씨는 이른 시기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목됐다. 현재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건희 회장에게는 당초 미디어 관련 계열사가 맡겨질 예정이었다.

동경농업대학과 동 대학원을 거쳐 미시건 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의 앞에 제대로 된 탄탄대로가 펼쳐진 것은 이병철 창업주가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면서 부터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1966년 한국비료가 밀수하려던 58톤의 OSTA(사카린 원료)가 부산세관에서 적발되면서 삼성이 2400만원의 벌금을 물었지만 논란이 커지자 이병철 창업주가 회장 직에서 물러나게 된 일이다. 삼성 계열사던 한국비료의 지분 51%는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사카린 밀수 사건 후 그룹 ‘지휘봉’
청와대 투서 사건으로 창업주 눈 밖에 

당시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 그룹 내 요직에 있던 맹희 씨는 아버지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룹 ‘지휘봉’을 잡았다. 1968년, 그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정상에 오른 계기가 됐던 ‘사카린 밀수 사건’은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왔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 창업주의 차남 창희 씨가 검찰 조사를 받고 구속된 지 2년 만에 청와대 투서 사건이 불거진 것. 여기에는 이병철 창업주의 외화 밀반출 등 당시엔 특히 심각하게 여겨지던 경제범죄 사실과, 이로 인해 이병철 창업주가 영원히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로 이병철 창업주는 창희 씨를 의심했다고 한다. 또 맹희 씨에 대해서도 불신을 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병철 창업주는 회고록인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언급했다. 이에 맹희 씨는 “창희 사건의 여파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는 금이 생겼다”며 “아버지는 나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하면서도 나에게 늘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곤 했다”고 회고했다.

이병철 창업주는 1973년 결국 맹희 씨를 향한 칼을 빼들었다. 당시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의 맹희 씨 직함을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의 부사장 3개로 줄였다. 그리고 이병철 창업주는 그룹 회장으로 복귀했다.

빼앗긴 ‘지휘봉’

맹희 씨는 일본행을 택했다. 일종의 반항이었다. 이병철 창업주가 일본을 찾아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반항은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겨울에는 사냥, 여름에는 승마에만 매달렸다. 아버지 그리고 회사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1976년 이병철 창업주는 암수술 차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가족회의를 열고 삼성 후계자로 삼남 이건희 회장을 지목했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 작고 뒤 이건희 회장에게는 반도체, 전자, 제당, 물산 등의 삼성그룹 주요 지분이 승계됐고, 맹희 씨에게는 안국화재 지분이 남겨졌다. 이병철 창업주는 맹희 씨의 장남이자 장손인 이재현 회장에게 제일제당을 삼성그룹에서 분리해 물려줬다. 제일제당은 CJ그룹으로 재출범했다.

맹희 씨는 개인적으로 제일비료를 설립해 재기를 꿈꿨으나 실패한 뒤 1980년대부터는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맹희 씨 삶에 대한 여정이 공개된 것은 1993년 맹희 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묻어둔 이야기> 등의 책을 내면서다. 그러나 책 출간 직후 맹희 씨는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CJ그룹 경영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가족들과 연락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현 회장의 딸, 즉 직계손녀인 경민씨의 결혼식에도 맹희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폐암 투병하다 중국에서 별세, 향년 84세
이재현 회장 건강 악화, 비통한 CJ그룹

은둔은 맹희 씨가 2012년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소송을 낼 때까지 이어졌다. 그 동안 간혹 소식이 들여오기는 했지만 구설수에 올랐을 뿐이다. 배우 박모 씨가 제기한 친자확인 소송이 대표적이다. 1961년부터 맹희 씨와 3년간 동거를 했다는 박 씨는 1964년 아들 이모 씨를 출산, 호적에 입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아들을 키워오다가 2004년 부산지방법원 가정지원에 이 씨가 맹희 씨의 친자임을 확인시켜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2006년 10월 아 씨가 맹희 씨의 친자임을 확정했고 박씨는 2010년 6월 서울중앙지법에 과거 양육비상환 소송을 제기, 2012년 재판부는 양육비 4억8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해 2월 맹희 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이건희 회장이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명의신탁을 해지한다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며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4조원대 소송을 냈다.

결과는 참패였다. 1·2심 법원은 “상속회복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지났고 재산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맹희 씨는 2014년 2월 상고를 포기했다.

당시 맹희 씨는 “주위의 만류도 있고 소송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간 관계라고 생각하며 상고를 포기하기로 했다”며 “그동안 제가 소송기간 내내 말씀 드려왔던 화해에 대한 진정성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어떠한 오해도 없길 바란다”고 입장을 전했다.

외로운 호화 생활

맹희 씨는 중국 베이징 창칭구 후이롱관진의 별장에 머물러 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곳은 비싼 가격과 실내 수영장·골프 연습장 같은 완벽한 시설 및 호수와 녹지공간 등 주변환경으로 베이징 3대 별장촌으로 꼽히며 중국 고관대작들이나 최부유층이 대거 몰려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맹희 씨는 교민들과의 접촉은 물론,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근처 한국식당이나 골프장에서 이따금씩 모습이 포착될 뿐이었다.

CJ그룹은 연이는 비보에 침통한 표정이다. 이재현 회장의 재판이 진행되지 않아 형이 확정되지 않은 탓에 광복절 특사에 대한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데다가 이재현 회장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재현 회장은 2013년 7월 횡령·배임·탈세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심 재판 중인 2013년 8월 만성신부전증 악화로 부인의 신장을 이식받았으나, 조직 거부반응으로 2년 째 구속집행정지 기간을 연장해가며 주거지로 제한된 서울대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다. 이재현 회장은 만성신부전증 외에 고혈압, 고지혈증과 함께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되는 유전병인 ‘샤르코-마리-투스’를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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