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중심에서 온천을 외치다

[파이낸셜투데이]
수안보온천은 인근에 스키리조트가 있어 겨울철이면 온천욕과 스키를 동시에 즐기려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충주호와 월악산국립공원도 수안보온천의 유명세를 더욱 살려준다.

‘수안보(水安堡)’의 지명 유래를 보면 ‘보(洑) 안쪽의 물탕거리’ 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한자로 변천된 것이다.

18세기 초 최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최초로 그같은 지명이 기록돼있다. 수안보온천이 있던 지역의 행정지명은 애초 상모면이었다. 그러나 수안보온천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탓에 2005년 4월 1일 면의 이름이 ‘수안보면’으로 변경됐다.

수안보온천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의 현종(재위 기간 1009~1031) 조 9년에 ‘유온천(有溫泉)’이라고 수안보온천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니 약 1천년 정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후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요지도서,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 30여 종의 역사책에 이름이 올라있다. 소문난 온천에 흥미로운 전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수안보온천관광협의회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들려준다. “용 한 마리가 따뜻한 이곳을 찾아 겨울을 나면서 병을 고치고 힘이 세어졌는데 하늘로 승천하려고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승천을 이뤘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전설입니다.”


조선의 왕들이 즐겨찾던 온천

역사서들은 조선시대의 왕과 선비들도 수안보를 즐겨 찾았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악성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안보를 찾았고 숙종 또한 휴양과 요양을 위해 이곳을 들렀다.

세종대왕의 부마였던 연창위 안맹담, 세조 때 우의정 권람, 숙종 때 명유 권상하 등이 수안보온천을 찾은 인물들이다.

치료 시설이 부족했던 옛날, 수안보온천에는 각종 질환을 가진 백성들이 이용하여 효험을 봤다. 1885년 노천식 욕조가 설치되면서 수안보온천은 근대 온천으로 발전했고 1929년 온천공 굴착으로 대중탕과 여관이 생겨나면서 현대식 온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대로 와서는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전 대통령 등도 수안보온천을 이용했다. 현재 온천수 공급은 충주시청에서 관리하며, 지하수를 섞어 쓴다든지, 물을 데워서 공급한다든지 하는 등의 불신을 말끔히 없애 이용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충주시청이 관리하는 초대형 온천수 탱크로부터 온천수를 공급받는 온천욕장은 호텔에서부터 전문욕장에 이르기까지 20여 개 정도이다.

수안보온천수는 지하 250~700m에서 솟는 물로 수온은 섭씨 53도이며 산도 8.3의 약알칼리성을 보이고 물의 성질은 부드럽다. 리튬, 칼슘, 나트륨, 마그네슘, 아연 등 인체에 이로운 광물질이 함유되어 있어서 피부미용, 대사촉진, 신경통, 생리작용 등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충주시에서 건립하고 수안보온천관광협의회에서 운영하는 수안보하이스파는 남녀대중탕을 보유하고 있으나 숙박시설은 갖고 있지 않다.

물탕공원 바로 옆의 수안보상록호텔에는 온천욕장 외에 참숯사우나, 맥반석사우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수안보파크호텔은 노천탕을 보유, 월악산 산줄기를 감상하면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음을 자랑한다.


1400년전 격전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미지의 사찰

온천욕을 마치고 찾아가보면 좋은 문화유적지로는 중원미륵리사지(수안보면 미륵리)가 있다.

미륵리사지는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명칭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절터이다. 미륵리 절터에는 석불입상, 오층석탑, 석등 같은 문화재가 남아 고려시대의 향기를 전해준다.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인 미륵리 석불입상은 높이가 10.6m이고 원통형의 거대한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간략한 옷주름 등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96호이다. 석불 앞의 미륵리 5층 석탑은 보물 제95호, 미륵리 석등은 충북 문화재 제19호이다.

미륵리사지에서는 하늘재까지 역사의 숨결이 서린 숲길 걷기를 즐길 수 있다. 문자기록이 남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고개로 꼽히는 고개가 바로 경북 문경시 관음리와 충주시 미륵리를 잇는 고개, 하늘재이다.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에 개통됐다. 하늘재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그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마골산, 마골참, 대원령, 한훤령, 겨릅재, 지릅재 등이 하늘재의 별칭이다.

충주를 대표하는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중원고구려비 등이 있다. 탑평리칠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 가운데 유일하게 칠층 구조를 갖고 있으며 높이는 14.5m로 가장 높다.

충주시민들은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을 곧잘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통일신라 때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상징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유래에서 비롯된다.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국내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로는 유일한 것이다.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닮았다.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국토로 확보하고 장차 남방 진출의 거점으로 삼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중앙, 중원이라는 말에서 짐작되듯 충주는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한 고장이다. 동서로 보든, 남북으로 보든 국토의 중앙에 충주는 놓여있다. 고구려 땅이었던 시절에는 ‘나라의 들’이라면서 ‘국원성’으로 불렸고 신라의 땅이 되고 나서는 다섯 개의 서울 중에서 가운데에 있다 하여 ‘중원경’으로 불렸다.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이전만 해도 충주시를 에워싼 고을 이름이 중원군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충주는 확실히 한반도 중앙에 떡 하니 자리잡은 고장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충주 사람들은 국토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실에 대해 매우 강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 물길을 굽어보기에 좋은 탄금대(충주시 칠금동)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신라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켜면서 망명의 한을 달랜 곳이자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순국의 현장이기도 하다.

충혼탑 옆의 ‘충장공 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에 그 사연이 밝혀져 있다. 본디 탄금대는 해발 200m 정도 되는 산으로 본래 명칭은 대문산이다.

현재 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가꾸어져 새벽이건 저녁이건 걷기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탄금정과 충혼탑 중간에는 항일시인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어 발길을 또 한 번 붙잡는다.

충주호 월악나루에서 미륵리사지로 가려면 월악산국립공원 구역을 지나게 된다. 산악인들은 한반도 중부에 자리한 월악산국립공원의 특징을 두고 ‘비경의 진수라 할 암봉과 기암계곡들을 추리고 추려서 한 장소에 모아놓은 것 같다’고 평한다.

충북 충주, 제천, 단양과 경북 문경 등에 산자락이 분포되어 있는 월악산국립공원의 상봉은 제천시 한수면과 덕산면 사이에 불끈 솟은 영봉(1,094m)이고 그 남쪽에는 만수봉(985.2m), 동쪽에는 문수봉(1,161.5m), 도락산(964.4m) 등이 솟아있다.

이처럼 봉우리가 많은 까닭에 송계계곡, 만수계곡, 용하계곡, 선암계곡 등 계곡도 여기저기 형성돼 있다. 송계계곡 인근의 덕주골 좌우로는 덕주사와 사자빈신사지석탑 등이 있어 문화유산답사객들의 발길을 기다린다.

<여행정보>
○ 문의전화
충주시청 문화관광과 www.cj100.net 043-850-6723
○ 교통편
[버스] 서울(강남)-충주 30분 간격 운행, 동서울-충주 20분 간격 운행 자가운전
[자가운전] 서울 :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나들목→수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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