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성수기, 코로나19로 인해 공급 부족
주요 부품 세대교체 맞물려 수요도 폭증
‘채굴장’ 내몰린 그래픽카드, 가격 폭등·품절
두 세대 전 물량까지 품절…‘하늘의 별 따기’
소매점주들 각종 채널로 “구매 참아라” 호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연말연초는 날씨가 추워지며 집 안에 있는 시간도 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PC·노트북 구매가 늘기 때문에 통상 PC 시장에서 성수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해 세대교체기 시작부터 이어져 온 공급 부족에 가상자산(암호화폐) 채굴 광풍이 겹쳐 ‘그래픽카드(VGA)’가 “씨가 말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20일 가격 비교 사이트 다나와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30시리즈’ 3000번대 그래픽카드가 3주 만에 사실상 2배 가까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9일 기준 발매 초기부터 전 세계적인 공급 부족 현상이 있던 RTX 3080은 100만원대에서 150만~200만원대까지 올랐고, 상대적으로 공급량이 많았던 RTX 3070과 RTX 3060 Ti는 각각 65만원대에서 90만~95만원대로, 55만원대에서 90만원대로 폭등했다.

3080이야 출시됐을 때부터 ASUS, MSI, 기가바이트, 갤럭시, 컬러풀 등 인기 제조사의 제품은 다소 품귀 현상이 있었지만, PALIT·PNY 등 비인기 제조사의 제품은 90만원대에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불과 3주 전까지만 해도 성능 면에서 이전 세대인 20시리즈를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측면에서 압도한 3070과 3060 Ti도 인기 품목이었지만, 3080만큼의 품귀는 없었고, 특정 제조사의 인기 라인업 정도만 가격이 오르는 정도였다.

관련 업계에서는 그래픽카드의 부족 현상을 가상자산(암호화폐) 채굴로 인한 수요 폭증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지난달 20일을 전후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주요 코인의 시세가 급격하게 올랐고, 그래픽카드를 이용해 많이 채굴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더리움의 경우에도 같은 시기 570달러(한화 약 63만원)에서 최근 1320달러(약 145만원) 이상으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2017년 비트코인 광풍이 불던 시절에도 그래픽카드는 극심한 물량 부족과 가격 폭등을 겪어야 했다. 엔비디아의 GTX 10시리즈(1050 Ti·1060·1070·1080·1080Ti)와 AMD의 라데온 RX 500시리즈(570·580·590)가 모두 채굴장으로 끌려가 소매점의 재고는 바닥나고 구매를 원하는 일반 소비자는 폭등한 제품을 사거나 구매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도 조립PC 시장은 마비됐었다.

당시 엔비디아·AMD 등 그래픽카드 설계기업들은 기존 제품의 GPU를 기반으로 하는 채굴 전용 그래픽카드를 내놓는 등 수요를 분산하려 애썼고, 끝없이 치솟을 것 같던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기세가 꺾이면서 GTX 10시리즈, RX 500시리즈도 일정 수준 가격이 안정화된 바 있다.

최근 상황은 2017년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채굴장으로 그래픽카드가 끌려가고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 다른 점이라면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가 이미 2017 코인 광풍 시기를 겪어봤다는 것과, 코로나19로 인한 부품 수급 차질 가능성, 이전 세대인 20시리즈를 가성비에서 압도하는 3060 Ti, 3070의 존재다. 30시리즈가 먼저 끌려갔고, 그마저도 모자라 은퇴한 20시리즈, 10시리즈도 재소환된 것으로 보인다. AMD GPU도 비슷하다. 2017년 당시 채굴 현역이었던 그래픽카드들까지 지금은 단종 문제와 얽혀 가격이 크게 올랐다.

특히 이번에는 새 학기가 시작하고, 계절적 요인으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데다 그래픽카드 세대교체 시기가 맞물렸다.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코로나19도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어 PC·노트북 성수기임에도 주요 그래픽카드의 가격 폭등으로 조립PC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채굴을 막거나 채굴을 위해 그래픽카드 구매를 제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가 자신의 돈을 들여 제품을 사서 어떻게 쓰는지는 국가가 나서서 개입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채굴을 위한 사재기를 방지하는 등 소비자 피해 최소화를 위해 나설 가능성은 있다.

제조사 측에서도 2017년 당시와 비슷하게 수요를 분산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발표된 RTX 3060 제품군은 상위 기종인 3060 Ti보다 성능이 다소 뒤처지지만, VRAM이 12GB로 3060 Ti보다 많다. 이에 엔비디아가 3060을 채굴용 수요를 위해 내놓은 것으로 보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8GB면 채굴에 충분하다는 반박도 나오는 상황이다.

아울러 AMD가 인텔과 경쟁하고 있는 CPU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고, 소니·마이크로소프트의 차세대 콘솔기기에도 칩을 납품하고 있어 그래픽카드 생산 여력이 다소 부족한 모양새다. 지난해 비대면 교육이 한창 이뤄지면서 노트북 수요가 폭증했을 때도 제조사와 무관하게 AMD CPU가 탑재된 노트북들에서 유독 장기간에 걸친 출고지연이 발생한 바 있다.

일반 고객들과 만나야 하는 소매점 입장에서도 난감한 상태다. 물론 오픈마켓에서 검색만 하더라도 현재 남은 그래픽카드 재고는 ‘용산 프리미엄’이 붙은 매물들이지만, 그마저도 구매를 누르면 재고가 없다며 취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매점주들은 유튜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PC 구매를 미루라”고 호소하는 상황이다. 소매점에서도 재고 확보가 어렵고, 그래픽카드 재고가 없으니 사무용 PC 정도만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채굴 열기가 식어야겠지만, 물량이 확보되는 것까지만 해도 3개월가량은 소요될 전망이다.

한 조립PC 업계 관계자는 “그래픽카드가 씨가 말랐다. 국내 공급사와 매일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데도 물량 확보가 힘들다”며 “지난해부터 시작해서 CPU가 모자랐다가 메인보드가 모자랐다가 그래픽카드가 모자라는 등 부품 수급이 안정적인 적이 없어서 매일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픽카드 가격은 2017년때처럼 피크를 찍고 나서 안정화될 때까지 3~6개월은 걸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파이낸셜투데이 변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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