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의약품 ‘공급 거부’ 논란 추적

공정거래위원회 이성구 서울사무소장이 2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독점생산 의약품의 공급을 거절한 녹십자의 불공정행위 제재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파이낸셜투데이=김상범 기자] 최근 녹십자(사장 조순태)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헤파빅’이라는 독점 생산 의약품을 여분이 있음에도 특정 도매상에 공급을 거부하다 공정위에 적발된 것이다.

업계 1위 동아제약이 리베이트 사건 등으로 주춤한 사이, 업계 2위 자리를 두고 유한양행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던 녹십자 조순태 사장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셈이다.

공정위는 지난 20일 녹십자가 특정 도매상과만 거래하는 방식으로 의약품 유통시장의 경쟁을 억제했다며 제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파이낸셜투데이>는 녹십자를 둘러싼 이번 사태에 대해 짚어봤다.

여분 있는데 특정 업체에 공급 안해 공정위 제재
물품 대준 곳엔 가격인상…‘보복 조치’ 의혹 받아

녹십자가 최근 공정위에 의해 ‘시정명령’ 조치를 받았다. 평소 녹십자와 거래가 없던 도매상에 여분이 충분함에도 물품 공급을 거부해 피해를 끼친 사실이 공정위 조사를 통해 적발됐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공정위는 간이식 환자용 의약품으로 알려진 ‘헤파빅’을 공급해 달라는 A도매상의 요청을 부당하게 거절하고 다른 도매상과의 거래만을 유지한 녹십자에 시정명령을 부과키로 했다고 밝혔다. 

공정위 및 제약업계에 따르면 이번 조치는 대형병원에 의약품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거래가 있었거나 친분 관계가 있던 특정 도매상 위주의 거래를 통해 제약업체가 의약품 유통시장의 경쟁을 억제하고 약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행을 금지시키기 위해서다. 

공정위에 따르면 녹십자는 지난 2010년 서울대병원에 헤파빅 납품계약을 따낸 의약품 도매상 A사의 제품공급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결국 A사가 약품을 약속된 시간 내에 서울대병원 측에 공급하지 못해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독점 생산’ 지위 남용?

제약업계에 따르면 ‘헤파빅’은 간이식 환자들의 B형 간염 감염을 예방하는 혈액제제로 국내에서는 이를 대체할 의약품 없이 녹십자가 독점 생산 중이다. 

일반적으로 헤파빅은 간이식 수술 첫해 투약비용만 570만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의 의약품이며, B형 간염 항체가 생성되지 않은 간이식 환자의 경우는 평생 투약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공정위 조사결과 평소 녹십자와 거래가 없던 도매상 A사는 지난 2010년 2월 서울대병원의 정맥주사용 헤파빅 구매입찰에서 최종낙찰자로 선정돼 1년간 10㎖ 병당 24만2천296원(보험기준가 대비 2.3% 할인)에 총 3만3천600병을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녹십자는 공급할 물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A사의 공급요청을 거절했고, 이에 병원 납품이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A사는 녹십자와 거래관계가 있는 다른 도매상 B사로부터 낙찰가보다도 높은 24만8천원(할인율 0%)의 가격에 제품을 확보해 병원에 겨우 납품 할 수 있었다는 것. 

공정위는 녹십자가 “물량이 없어 공급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점에 대해 전년도 초과 생산량(63,622Vial)이 존재했으며, 페널티 없이 물량조정 가능한 계약 특성, 수시로 소량씩 공급하는 방식 등을 고려했을 때 공급여력이 충분히 남아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녹십자의 공급 거부로 인해 A도매상은 물론 서울대병원도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게 됐다. 또한 A도매상에 물품을 대준 B도매상 역시 ‘보복 조치’로 의심 받을 만한 일을 당하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병원은 A도매상의 납품 지연으로 일부 물량(1,500Vial)을 수의 계약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당초 낙찰가격 24만2천296원(할인율 2.3%)보다 높은 가격인 24만7천760원(할인율 0.5%)으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업계관계자 및 공정위에 따르면 A도매상에게 헤파빅을 공급한 B도매상의 경우에도 녹십자가 의약품 할인율을 보험기준가 대비 기존 6%에서 2.7%로 낮춰, 사실상 일방적인 공급가격 인상이라는 ‘보복 조치’를 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된 상태다.

피해는 결국 ‘소비자’

공정위는 납품지연에 따른 배상과 낙찰가를 상회하는 구매가격으로 A사가 입은 손해는 약 1억5천만원 정도라고 추산했다. 

공정위는 녹십자가 당시 A사에 물량을 공급할 재고여력이 있었던 점으로 미뤄 다른 도매상과 차별하며 부당하게 거래를 거절한 것으로 보고 시정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다만 녹십자가 부당이득을 얻었다거나 A사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 별도 과징금은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 

고병희 공정위 서울사무소 경쟁과장은 이번 사태에 대해 “대형병원 의약품 공급 과정에 있어 특정 도매상 위주로 거래를 유지하면서 제약업체가 공정한 경쟁을 억제하고 약값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제약업체가 병원의 의약품 경쟁입찰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켜 병원마다 특정 도매상들과 거래가 고착화된다면 피해는 결국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녹십자 관계자는 <파이낸셜투데이>와의 통화에서 “해당 내용에 대해 공정위 측의 공식 의결서를 받아 본 후 공식 입장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공정위가 녹십자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일부 언론에서 이번 사건을 두고 이른바 ‘갑의 횡포’ 논란까지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공정거래법상 부당한 거래거절에 대해 관련 매출액의 최대 2%(1억6000만원)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데도 도매상의 피해규모가 크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점적 지위를 남용, 도매상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국 소비자들의 피해를 자초하게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에 대해 녹십자 측의 명쾌한 해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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