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추천이사제, 기업은행 시작으로 금융권 내 확산될까
윤종원 행장 “경영에 직원 목소리 반영할 수 있는 제도”

지난달 29일 첫 출근한 윤종원 IBK기업은행장. 사진=연합뉴스

금융권에선 그동안 도입되지 않았던 노조추천이사제가 IBK기업은행을 시작으로 금융권에 확산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윤종원 행장이 본점 출근을 앞두고 지난달 27일 노조추천이사제를 추진에 대해 기업은행 노조와 합의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윤종원 기업은행장은 서울 을지로 본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노조추천이사제는) 오랫동안 생각을 많이 한 이슈다”며 “직원들의 이해와 여론을 경영에서 수렴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있으면 좋겠다고 익히 생각해왔다”고 밝혔다.

노조추천이사제는 노조가 추천하는 인물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는 제도로 노동자 대표가 직접 사외이사로 활동하는 노동이사제보다는 노조 목소리를 상대적으로 간접적으로 전한다. 노조추천이사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노동이사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기업은행이 노조추천이사제를 추진하는 뒷배경에는 윤 행장과 노조의 갈등이 있었다. 윤 행장은 지난달 3일 청와대로부터 새로운 기업은행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노조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노조는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과 국제통화기금(IMF) 상임이사,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거친 경제 관료 출신인 윤 행장을 두고 관치금융과 낙하산인사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이에 노조는 지난달 3일부터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으며 윤 행장은 지난달 내내 외부에 임시 집무실을 마련해 업무를 봐야 했다.

하지만 설 연휴가 지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노조가 지난달 28일 출근 저지 투쟁을 철회하고 29일 기업은행이 윤 행장 취임식을 진행한 것이다. ‘함량 미달 낙하산 인사 반대’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던 기업은행 본점에는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의 플랜카드가 새롭게 걸렸다.

내막은 이렇다. 윤 행장과 노조는 설 연휴에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의 물꼬를 텄고 연휴 마지막 날이던 지난달 27일 합의에 이르렀다. 윤 행장과 김형성 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노사 공동 선언문’에 함께 서명했으며, 출근 저지 투쟁도 지난달 28일 ‘26일’ 만에 막을 내렸다. 참고로 ‘26일’은 금융권 내 최장 출근 저지 투쟁 기록으로 노조의 반대가 극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사 공동 선언문에는 ▲희망퇴직 문제 조기 해결 ▲정규직 전환직원 정원통합 추진 ▲직무급제 도입 등 임금체계 개편 시 대한 노조 동의 받기 ▲임원 선임절차 투명성과 공정성 개선 ▲노조추천이사제 추진 ▲질병 관련 휴직 확대 등의 내용이 명시돼 있다. 특히 이중 노조추천이사제 추진 카드가 노조의 마음을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직 금융권 내 해당 제도가 도입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결국 정부가 낙하산 인사를 위해 노조추천이사제 카드까지 사용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노조도 역시 낙하산 인사 반대를 명분으로 노조추천이사제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하며 한발 물러선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금융권에서는 노조 주도로 노조추천이사제 도입을 추진해온 바 있다. 2017년 11월에는 KB국민은행에서, 지난해 3월에는 기업은행에서 노조추천이사제를 시도했으나 모두 불발됐다. 지난달 수출입은행도 노조가 추천한 인사가 사외이사 후보에 포함됐지만 최종 임명까지는 성사되지 않았다.

노조추천이사제는 기업 경영에 노조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나 반대로 경영의 효율성을 해치고 과도하게 노조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노동이사제가 문 대통령의 공약임에도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3월 “은행권 종사자의 급여나 복지 수준으로 볼 때 금융권이 다른 분야보다 먼저 도입해야 할 만큼 열악하거나 불리하지 않다”며 반대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만 기업은행 노사는 직원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 노조추천이사제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입장이다. 직원들의 의견을 노조가 추천한 사외이사를 통해 경영에 반영함으로써 은행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노조가 적절한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를 추천한다는 점을 전제로 달았다. 또 노조추천이사제를 잘 운영해나가기 위해 노사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했다. 윤 행장은 이를 통해 해당 제도가 긍정적으로 자리 잡힌다면 금융권 내로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권 전반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노조추천이사제가 윤 행장을 향한 반대를 누르기 위한 카드로 사용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피해갈 순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기업은행의 사례를 이유로 다른 금융기관 노조도 노조추천이사제 도입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지금 당장 해당 제도를 추진한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노조와 함께 검토하겠다는 내용이다”며 “그리고 이미 사외이사 중 타 금융기관 노조 출신이신 분이 있다. 이미 노조에 대한 인식을 갖고 계신 이사분이 활동 중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기업은행 노조가 투쟁을 철회한 가운데 다음 타자로 기업은행 자회사가 시위에 나섰다. 기업은행의 자회사인 IBK저축은행 노조는 지난 4일 임금 단체 협상을 이유로 시위를 진행했다. 기업은행은 IBK저축은행을 비롯한 자회사들과 물밑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투데이 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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