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주문한 ‘숙제’
김지형 전 대법관, “삼성이 먼저 변화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 중요, 독립적인 기구로”
유리한 양형사유로 삼기 위한 ‘면피용’이라는 비판 벗어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삼성 깃발. 사진=연합뉴스

다음 달 공식 출범하는 삼성그룹의 ‘준법감시위원회’를 두고 이를 지켜보는 업계와 사회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삼성이 잘 정착시키면 국내 기업과 사회 전반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을 위한 방패막이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이재용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실효적인 준법 감시제도를 다음 공판까지 마련하라”라며 일종의 숙제를 내줬다. 이번에 신설되는 위원회는 오는 17일에 있을 공판이 열리기 전에 삼성이 재판부의 주문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원회는 삼성의 계열사들이 이사회의 의결사항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미리 보고, 문제가 있으면 시정과 제재를 요구할 수 있는 기구다. 김지형 전 대법관을 주축으로 고계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총장, 권태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봉욱 변호사, 심인숙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인용 삼성전자 사회공헌업무총괄 고문 등 총 7명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이인용 고문을 제외하면 6인이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것인데, 김 전 대법관은 이를 두고 “위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함으로, 영역별 전문성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대표성을 확보하려 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법관이 ‘독립성’과 ‘자율성’에 무게를 둔 만큼, 위원회의 운영 또한 독자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도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닌데, 위원회의 권한에 강제성이 없고 계열사에서 주는 내부 자료를 가지고 감시를 해야 하기에 제대로 된 견제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 사진=정진성 기자

실제로 삼성은 2006년 엑스파일 사건 직후에도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고 구조조정본부 축소 등을 발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을 운영하겠다고 했으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또 2년 뒤인 2008년 ‘이건희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건희 회장이 퇴진하고 그룹 전략기획실을 해체했지만, 결국 이름만 미래전략실로 바꿔 부활하고 이건희 회장도 경영에 복귀한 전례가 있다.

물론 이번 위원회는 전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의견도 많다. 김 전 대법관이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는 점, 위원회 구성 인사들을 모두 직접 영입했다는 점이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내부 위원인 이인용 고문도 삼성의 추천 없이 김 전 대법관이 직접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위원의 구성과 감시 대상, 지위 등이 지금껏 재계에는 없었던 ‘파격’이라 평가하고 있다.

시민사회 인사가 포함된 상설 외부 준법 감시기구인 점도 국내에서는 첫 사례다. 해외에서도 전문 준법경영 자문 기관에 의뢰 하는 경우가 있지만, 상설기구를 만든 사례는 생소한 편이라는 평가다.

또 준법 감시제도의 아이디어가 미국 연방 양형기준 제8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미국 연방 양형기준 제8장은 구체적이면서도 실효성 있는 준법 감시제도를 요구하며 이를 평가하는 기준도 상세히 정하고 있다. 해당 양형기준은 준법 감시를 위한 기준을 만들고, 경영진을 교육시키며 내부고발자 보호 시스템을 만든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번 위원회에서 사전 예방 조사와 더불어 직무교육, 이행점검, 내부고발자 익명 신고 제도를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이 해당 제도와 들어맞는다.

사진=연합뉴스

이 제도가 시행된 1991년 이후에는 미국의 기업 문화가 바뀌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양형기준이 기업 스스로 위법행위를 억제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삼성이 잘 정착시킨다면 타 기업과 사회 전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를 하는 상황이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이 먼저 변화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이번 위원장직 수락 배경을 밝혔다. 또한 “신뢰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만들고 쌓아나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삼성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노조 와해 논란,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 등 기업의 윤리경영에 위배 되는 사건들이 잇따라 터진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삼성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있는 상황. 하지만 위원회가 실효성을 가지고 김 전 대법관이 장담했듯 ‘윤리경영에 대한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국내 기업과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은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위원회 신설이 재판부의 ‘숙제’를 넘어 삼성의 진정한 ‘기업 쇄신’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파이낸셜투데이 정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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