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무역적자 16년 만에 최저, 소부장 기술 격차 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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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에 매우 의미있는 전망이 나왔다. 일본에 대한 무역수지 적자가 1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는 한일 국교 50년이 넘도록 한국이 단 한번도 일본과 무역수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상당한 의미가 있다. 아울러 현재 한국이 일본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도 의미를 더한다. 선제공격에 나선 일본에 카운터 펀치를 날려 콧대를 꺾은 셈이다. 특히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추진 중인 ‘소부장’ 분야 경쟁력 강화 대책이 성공하면 장기적으로 대일 무역역조의 큰 흐름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까지 나오고 있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체제가 붕괴되며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 사무라이들을 서양에 유학 보냈다. 이들이 돌아와 현대 기초과학을 일본에 이식했고, 일본은 1886년부터 도쿄제국대학을 비롯한 전국의 17개 제국대학을 설치해 기초과학 연구를 본격 시작했다. 1917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기초과학 종합연구소인 이화학연구소(RIKEN)를 설립하면서, 20세기 초에 세계 수준의 연구환경을 갖췄다. 일본은 국가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GDP의 2% 이상을 R&D 예산으로 확보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1995년에는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하고, 2011년부터는 종합과학기술회의를 설치하는 등 연구의 저변을 확대했다.

일본의 기초과학에 대한 열정은 원천 기술 확보라는 결과를 이끌었고, 이는 좋은 품질을 가진 소재와 부품, 장비로 연결됐다. 일본이 이른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강국’으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게 된 배경이다.

◆ 日 노벨상 강국 자리매김한 비결은? 기초과학 연구에 아낌없는 투자

일본의 소부장 기술은 해당 분야에서만 노벨상 수상자를 10명이나 배출할 정도다.

1973년 반도체 물리학자인 에사키 레오나(江崎玲於奈)가 반도체 소재 기반 기술 개발의 공로를 인정 받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시라카와 히데키(白川英樹)가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발견한 업적을 인정 받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노요리 료지(野依良治) 일본 연구개발전략센터 센터장이 화학 공정용 촉매 기술을 개발해 노벨화학상을 받았으며, 1년 뒤인 2002년에는 당시 평범한 회사원이던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가 약품 개발 등에 활용되는 분석 기술을 개발해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된 요시노 아키라 아사히카세이㈜ 명예 펠로. 사진=연합뉴스

2010년에는 스즈키 아키라(鈴木章) 훗카이도대학교 교수와 네기시 에이이치(根岸英一) 퍼듀대학교 교수가 OLED 제조 등에 필요한 촉매를 개발하면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는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캘리포니아대학교 산타바바라캠퍼스 교수와 아카사키 이사무(赤崎勇) 메이조대학교 교수, 아마노 히로시(天野浩) 나고야대학교 교수가 청색 LED(발광다이오드)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요시노 아키라(吉野彰) 메이조대학교 대학원 교수에게 현재 휴대전화, 노트북, 전기차 등 모든 분야에 사용되고 있는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이 수여됐다.

◆ 양국간 기초과학 격차, ‘최소 50년, 최대 100년’

반면 한국은 1945년 해방 이후 근대적 연구 교육체계가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초과학 육성은 항상 후순위였다. 산업화라는 국가적 과제가 우선시 됐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뤄냈지만 기초과학 분야에서 이웃나라 일본과의 격차는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1966년 설립된 최초의 국가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1971년 출범한 연구 중심대학 KAIST 역시 기초과학보다는 산업 기술 보급에 주력했다. 일본의 이화학연구소 같은 역할을 하는 기초과학 종합연구기관인 기초과학연구원(IBS)은 2011년이 돼서야 출범했다.

100년도 더 전에 기초과학 연구 나선 일본
든든한 원천기술 덕에 ‘소부장 강국’으로 우뚝
소부장 분야에서만 노벨상 수상자 10명 배출

그러는 동안 일본에서 생산된 소재와 부품, 장비는 한국산업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산업인 반도체에 주로 쓰이는 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대체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의존도가 높은 소재다. 레지스트는 반도체 기판 제작 때 사용되는 감광액이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스마트폰의 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되기 전인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레지스트, 플루오드 폴리이미드에 대한 대일 수입의존도는 각각 91.9%, 93.7%다. 같은 기간 일명 ‘에칭가스’로 불리는 불화수소의 의존도도 43.9%로 높았다. 불화수소는 스텔라, 모리타 등 일본 업체가 세계 수요의 9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 아직도 높은 대일 의존도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일 국교 50년이 넘도록 한국은 단 한번도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소재·부품의 무역수지 적자는 최근 5년간 763억달러(약 90조원)에 이른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소재·부품에서 일본과 무역수지는 67억달러(약 7조8000억원)로 올 상반기 전체 대일 무역수지 적자 99억달러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부품은 전자부품(-21억2000만달러), 일반기계부품(-5억2000만달러), 정밀기기부품(-4억5000만달러), 전기장비부품(-4억1000만달러)이 적자다.

소재는 화학물질 및 화학제품(-18억5000만달러), 고무 및 플라스틱(-7억달러), 1차금속제품(-4억5000만달러), 비금속제품(-2억7000만달러)이다.

◆ 원유 수출국 보다 큰 대일 무역적자액

대일 무역적자액은 세계 각국 중 가장 크다. 지난해 기준 국가별 무역수지 적자액은 일본이 240억8000만달러로, 한국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223억8000만달러), 카타르(157억7000만달러), 쿠웨이트(115억4000만달러) 등 보다 많았다.

최근 전해진 대일 무역수지 적자가 크게 줄었다는 소식이 반가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올들어 지난달 말까지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163억66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206억1400만달러)보다 20.6%나 줄었다. 역대 1~10월 기준으로 따지면 2003년(155억6600만달러) 이후 가장 적은 적자다. 이런 추세라면 2003년(190억3700만달러)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대일 무역적자가 200억달러를 밑돌게 된다. 역대 최고치였던 2010년(361억2000만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대일 무역역조가 개선된 것은 수출 감소폭 보다 수입 감소폭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우리가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줄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물량이 훨씬 더 많이 줄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지난 10월까지 대일 수출액은 237억4600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 줄어드는 데 그쳤으나 같은 기간 수입액은 301억1100달러로 무려 12.8% 감소했다. 이같은 추세가 연말까지 지속된다면, 올해 일본산 수입 감소율은 2015년(14.7%) 이후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 ‘독 아닌 약’으로 작용한 일본 수출규제, 자립 가능성 보여줬다

일본산 수입이 감소한 것은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시설 투자를 조절하면서 일본산 부품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 부품과 장비 수입을 대폭 줄인 게 주된 요인으로 지목됐다.

지난 7월 4일 일본 정부는 불화수소, 레지스트, 폴리이미드의 대 한국 수출을 개별허가제로 전환하면서 건건이 정부 허가를 받게 했다.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해당 품목들은 반도체 공정 필수 소재인데다가 일본 업체들이 독점적 공급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재고를 아껴쓰면서 대체재를 찾는데 온 힘을 쏟았다. 최소한의 양을 제조에 투입하거나, 사용했던 제품을 재활용하는 등 공정을 조율했다. 그러면서 양사는 대만,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우회 경로와 공급선을 찾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 등 경영진들은 현지 회사를 직접 찾아 대책을 강구했다.

대안은 속속 마련되기 시작됐다. 의존도가 가장 높았던 레지스트는 일본 JSR과 벨기에 IMEC가 만든 합작법인 RMQC를 통해 부족분을 채웠고, 불화수소의 경우 삼성전자는 중국, 대만에서, SK하이닉스는 국내 업체인 램테크놀러지에서 공급받아 공정에 투입했다. LG디스플레이는 공정에 필요한 불화수소를 100% 국내 제품으로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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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은 한 고비 넘긴 상태다. 실제로 반도체 불황기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불화수소 부족분을 채운 국내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큰 폭으로 올랐다. SK하이닉스에 불화수소 대체품을 공급한 램테크놀러지의 3분기 영업이익은 15억860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배 이상 올랐다.

삼성전자와 협력해 액체 불화수소 대체품을 공급한 이엔에프테크놀로지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3분기보다 84%나 증가한 197억8000만원을 달성했으며, 함께 공급한 솔브레인 역시 같은 기간 7.3% 오른 502억원을 기록했다.

반대로 일본기업은 무너졌다. 일본 불화수소 주요 기업인 스텔라의 3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8%나 줄어든 15억6700만원을 기록했다. 또 다른 일본 불화수소 공급 업체인 모리타 화학 역시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다고 전해졌다.

◆ “안 사요, 안 가요” 자동차·맥주 퇴출, 비행기는 ‘텅텅’

일본 불매운동으로 자동차, 의류, 주류, 전자제품 등 주요 소비재의 수입이 큰 폭으로 줄어든 것도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한 몫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4일 발표한 10월 국내 자동차산업 동향 잠정치에 따르면 인피니티를 제외한 혼다·렉서스·토요타·닛산 등 일본산 수입차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급감했다.

일본차 판매량은 일본 불매운동이 본격화한 8월부터 급감해 3개월 연속 낮은 추리를 이어가고 있다. 전년 동기와 비교했을 때 8월에는 58.9% 감소했고, 9월엔 59.8% 감소했다.

극심한 판매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산 자동차는 브랜드 별로 수천만원씩 할인에 나섰지만 판매량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불매운동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던 일본 의류업체 유니클로는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약 1400억엔 달했지만 올해 8월 적자로 전환했다.

한국 매출 비중이 50%를 차지하는 데상트도 큰 타격을 받았다. 데상트는 2020년 3월 기준 연결 순이익의 전년 대비 82% 감소한 7억엔에 그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예상은 34% 증가한 53억엔이었다.

반도체 필수 소재 대부분 일본산에 의존
수출규제 나선 일본, 대안 마련 성공한 한국기업
정부, 소부장 개발 가속…투자 늘리고 조직 신설
文 대통령 “제조업 경쟁력 강화 박차” 주문

2009년부터 10년 간 국내 맥주 시장 ‘왕좌’ 자리를 수성하던 일본 맥주는 퇴출 위기다. 한국무역통계진흥원에 따르면 올해 9월 일본 맥주 수입액은 6000달러로 지난해 동기보다 99.9% 줄었다. 국내 수입국 순위에서도 일본은 1위에서 28위로 내려앉았다.

GS25, CU, 세븐일레븐 등 주요 3대 편의점에서도 일본 맥주의 올 10월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평균 86% 가량 줄었다. 특히 아시히는 GS25에서 10월 41위까지 떨어졌다. 기린이치방 또한 6월 5위에서 8월 48위, 10월엔 50위까지 하락했다.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DL 20일 발표한 지난달 방일 외국인수 추계치를 보면 올해 10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19만7300명으로 1년 전보다 65.5% 줄었다.

전년 동월과 비교한 방일 한국인 감소율은 7월에는 7.6%였는데 8월에 48.0%로 뛰었다. 9월에는 58.1%였는데 지난달 감소율이 더 커졌다.

전문가들은 내년 반도체 업황이 회복될 경우 대일 무역적자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중·장기적으로는 대일 무역환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 소부장 자립화 달성 위해 2조1천억원 예산 투입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핵심 소재·부품·장비의 조기 자립화를 달성하기 위해 내년 에 올해의 2배가 넘는 2조1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또한 우리나라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관련해 대통령 직속 위원회와 관련 부처, 기업 등 민관 협력방안을 조율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전담조직인 ‘소재부품장비협력관’을 신설한다.

소재부품장비협력관실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직속 ‘소재부품장비경쟁력위원회’ 운영과 지원, 규제 개선 신청에 따른 관계부처 협의 등을 맡게 된다. 또 정밀화학 분야 업무와 국제협약 이행 등에 대한 업무도 전담한다. 소재부품장비협력관실은 소재부품장비시장지원과, 화학산업팀 등 ‘1과·1팀’ 체제의 29명으로 구성되며 앞으로 1년간 활동한다.

소재·부품·장비 기초·원천기술 조기 확보를 위한 투자규모도 대폭 늘렸다. 2019년 본 예산은 1770억5000만원이었지만 2020년 정부안은 3851억8000만원으로 117% 증가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기초·원천연구개발(R&D) 실행계획을 확정하고,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 등 주력산업 분야에서 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전략 소재·부품의 ‘중점요소기술’ 개발을 지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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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충남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열린 13조원 규모의 투자협약식에서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경쟁력을 지키면서 핵심소재·부품·장비를 자립화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디스플레이·제조 강국’으로 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10일 국무회의에서도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근본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핵심기술의 자립화에 속도를 높여야한다”며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가할 것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특정국가 의존도가 높은 25개 핵심품목에 대한 기술개발에 착수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소재의 국산화가 가시화되고 있다”며 “정부는 과거와는 다른 접근과 특단의 대책으로 이같은 긍정적 변화에 속도를 더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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