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가락국과 고령 대가야의 당당한 경쟁국 안라국
가야 전시대 가장 오랫동안 강력한 힘을 가졌던 국가
문헌자료 남지 않아 가락국과 대가야에 비해 홀대받아

함안 말이산 고분. 사진=한국관광공사

아라가야(阿羅伽倻) 즉 안라국(安羅國)은 경남 함안군 일원에 자리 잡았던 가야 소국 중 하나다. 안라국은 변한 시대부터 있던 나라로, 가야연맹 국가 중 그 위치가 논란 없는 주요국가 중 하나다. 가야연맹내에서도 안라국을 형님격으로 모시고 따랐을 만큼 금관가야와 대가야 외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나라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는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으로,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라(阿羅羅)로 나타난다. 또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는 <가락국기>를 인용해 아시랑국(阿尸良國)으로 기록했다.

안라국은 김수로왕과 함께 구지봉에서 태어난 6명의 동자중 한명인 김아로(金阿露)가 건국했으며, AD42년부터 561년까지 519년간 지속됐던 나라다. <후한서> 건무(建武) 20년(AD44년)에 염사(廉斯)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 염사국이 바로 안라국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확인된 유적이나 유물로 미루어 안라국은 가야 초기부터 변한지역의 주요 유력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말 중국의 진수(陳壽)에 의해 편찬된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 기사에 보면 3세기 무렵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는 마한 54개국, 진한 12개국, 변진(변한) 12개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변한의 한 나라인 안야국이 오늘날 함안지역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당시 삼한의 여러 소국들 가운데 강대국의 수장들에게는 일반 소국의 수장들보다는 우대하는 존칭을 덧붙여 불렀는데, 안야국도 이에 속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는 안야국의 수장에게는 ‘안야축지(安邪踧支)’라는 이름으로 우대해 불렀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안야국이 변한단계에 있었던 여로 소국 가운데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졌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주목받지 못한 가야의 맹주 안라국

안라국은 가야 후반기 남부 가야소국들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등장해 고령의 대가야와 자웅을 겨뤘으나 김해 가락국과 고령 대가야에 비해 홀대를 받아왔다. 이는 안라국이 가락국과 대가야에 비해 문헌 기록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라국은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강국의 지위를 누려온 나라였다.

가야연맹 영역

김해 가락국은 전기 가야 시기에 가야 소국들의 리더로 활약하지만 후기 가야 시기에는 문헌에서 그 존재 자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 일로를 걷다가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멸망됐다는 기록만 나타난다. 고령 대가야는 전기 가야 시대에는 그 활동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가 후기에 접어들어서야 두각을 나타낸다. 안라국은 전기 가야 시대에는 김해 가락국과 쌍벽을 이뤘으며, 후기에는 대가야 못지않은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록상으로는 대단한 권세나 상징성을 가진 안라국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그 시기 함안이 주변 지역에 비해 특출난 흔적이 없어 가뜩이나 힘든 가야사 복원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안라국의 4세기 이전 유적은 거의 찾기 힘들며,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강국의 면모가 드러나는 같은 시기 김해 가락국이나 신라 경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도로 세력권이 미약하다.

후기 가야시대 안라국은 주변 소국들을 이끄는 리더의 국가였다. 또 대가야와 안라국만 ‘한기’(우두머리를 뜻함=간지(干支))가 아닌 ‘왕(王)’ 칭호를 쓰거나 나름대로 분화 및 체계화된 관직체계가 엿보이는 등 여타 소국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처럼 안라국은 대가야와 더불어 높은 위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으로 보이는 실제 영역은 지금의 함안지역을 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헌들이 많이 남지 않아 안라국이 변한지역에서 어떻게 유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황상 함안은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남강 남쪽에 위치하고 남해(南海)와 가까워 김해 가락국이 통제하는 낙동강 하류 수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바깥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라고 추정 가능하다.

평지에 조성된 안라국 초기 고분

안라국 초기인 3~4세기 무렵 함안 분지에서 유구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로 대부분 평지에 무덤을 조성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당연히 이 땅들은 훗날 논이 되는 등 평지가 부족한 경상도 지역 특성상 인간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파괴되어 잔존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말이산 고분군의 위치와 구조를 미뤄봤을 때 지금의 함안군 가야읍 시가지에 초기 무덤들이 존재했다는 추측 가능하다.

안라국 무덤 내부. 사진=함안군 공식 블로그

특히 3~4세기 무렵 무덤은 그 당시 중심지 바로 근처에 조영되었고, 4세기 이후 삼국 시대에 진입하면서 인구가 폭증했기 때문에 시가로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번 파괴된 3~4세기 무렵 고분이 있던 자리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 활동이 일어나며, 근현대에 엄청난 인구 증가·도시화와 결정타로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건설되면서 고분들이 엄청나게 파괴됐다. 결정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구제 발굴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것이 1990년대 임을 상기시켜 보면 5세기 성토 분구를 쌓기 전 고분들은 거의 다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 조사가 가장 활발히 진행된 영남 지역의 경우 특히 초기 국가가 형성되고 대규모 취락이 생기는 3~4세기 무렵의 고분 자료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기원전·후부터 5~6세기 까지 고분 자료가 풍부하게 조사된 김해 가락국의 경우 정말로 천운이 따라 평지에 조성된 목곽묘·목관묘들이 많이 조사된 경우다.

안라국의 중심 고분군인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경우 북쪽 능선에는 4세기 후반 고분이 조사되고,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5~6세기로 시기별 축조 지역이 확실해진다. 따라서 3~4세기 무렵 고분은 말이산 북쪽 현재 가야읍 중심지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3~ 4세기 무덤들은 성토 분구가 없어 무덤인지 알 수 없어 아주 손쉽게 파괴됐을 것이다.

함안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는 5세기 이전 분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기 가야에서 안라국의 위상을 알기 어렵다.

영남 지역 고대 역사 향방 가를 안라국 토기

4세기 무렵 조성된 것이 확실한 우거리 토기 가마 요지에서는 안라국의 특징적인 도질토기 문화를 알 수 있으며, 황사리 등 함안의 주변 지역에서 우거리 요지에서 출토된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된다.

또 3~4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독자적인 양식의 토기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토기의 연대를 3세기 중후반으로 끌어 올리느냐, 4세기 초반으로 내리느냐에 따라 영남 지역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는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만일 3세기 후반에 독자적인 도질토기 양식이 확인된다면 이는 안라국이 김해 가락국과 맞먹는 생산 체계와 독자적인 제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해석되며, 앞서 언급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금관국과 더불어 안라국이 마한 왕으로부터 우대받았다는 기사와 부합된다.

반면, 기존 김해 가락국 역할을 강조하는 역사학자들의 편년안에 의하면 이 토기들은 4세기 초나 심지어는 김해로부터 이입품일 가능성도 지적한다. 따라서 이에 따른 역사상은 금관국의 안라국, 심지어 사로국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고 해석된다.

안라국 도질토기의 구체적인 양상은 가락국과 비슷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분된다. 원삼국시대 토기인 와질 토기에서 도질화(경질화)되는 단경 호류에 성형시 승문타날(繩文打捺)이 가해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침선을 돌려 돗자리 문양이 전면에 베풀어지며 양쪽에 귀가 붙어 있다.

안라국 토기. 사진=함안군 공식 블로그

기벽이 대단히 얇으며 구연부나 동체부가 대칭적이며 아래에는 토기 종류나 장인들을 구분하기 위해 시문한 기호인 ‘도부호’가 그려져 있다. 이 기종을 승석문양이부호라고 부르며 안라국 양식의 특징적인 토기로 본다.

또 고배는 ‘工’자 모양의 대각에 삼각형 투공 뚫린 무개고배가 있으며 이는 단각에 외절구연의 접시가 붙은 가락국의 ‘외절구연고배’ 는 확연히 구분된다. 파수부가 묻지 않은 노형기대도 가락국과 구분된다.

이 토기들은 당대 경쟁 국가인 김해 가락국의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되며, 낙동강 건너 복천동은 물론 대구, 칠곡, 진한의 유력국이었던 사로국(후에 신라)의 고분군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특히 안라국 양식의 단경호는 4세기 후엽 대구 신당동 요지에서도 모방품이 제작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형태는 비슷하나 기벽이 두껍고 타날 간격에서 차이가 관찰되며 결정적으로 도부호가 시문되지 않은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함안 양식 토기들이 단순히 영남 지역 전체로 운반되어 부장된 것뿐 만 아니라 각 지역의 도질토기 생산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가락국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외절구연고배를 비롯한 파수부노형기대, 단경호 등이 진영 분지, 창원, 고(古)김해만, 부산 동래 지역 등에서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과 대비된다. 즉 가락국의 특징적인 양식은 가락국 권역 안에서만 유통되었지만, 아라국 양식의 토기들은 부산, 김해를 비롯한 경주, 대구, 칠곡 등 범 영남 지역에 전체적으로 유통된다. 심지어는 남해안 지역을 따라 영산강 유역의 호남 지역과 일본 열도에서도 반출된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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