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사회와 더불어 성장
‘사회적 가치 전도사’ 자청하고 글로벌 광폭행보
회의적 시각 극복하고 뚝심있게 밀고 나가
무형의 가치 측정하는 시스템 도입해 지표와 기준점 제시

최태원 SK 회장이 19일 저녁(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SK Night(SK의 밤)' 행사에서 사회적 가치를 통한 파트너십의 확장을 주제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SK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기업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활동으로,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 처음 등장했다. 영리활동과는 무관하다.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일방적으로 사회에 떼어주는 것으로, 한 마디로 ‘잘 보이기’ 위한 활동이다. 분명 ‘좋은 일’인 것은 맞지만 기업의 이익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 운영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게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 개념이다. 기업이 사회적인 요구를 파악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SV, Social Value)를 창출함과 동시에 경제적인 수익도 발생시키는 경영전략이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의 화두가 CSR과 CSV, 그리고 SV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가장 먼저 읽고 그에 맞춰가는 국내 기업 오너가 있다. 바로 최태원 SK 회장이다.

SK의 사회적 가치는 한마디로 ‘짝’이다. 경제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해 사회와 더불어 성장한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 경제적 가치만 창출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가치를 충족시킴으로 인해 기업의 지속 성장과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국적 식품기업 네슬레는 초콜릿 과자 킷캣의 품질 개선을 위해 저개발국 농부들에게 양질의 기술을 교육하는 네슬레 코코아 플랜 시행을 통해 농부들이 더 많은 돈을 벌게 하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함과 동시에 네슬레의 경제적 이익도 견인했다.

또 미국 유통업체 월마트는 정부, 시민단체, 재활용업자 등과 연계해 미국 내 도시 곳곳에 재활용 설비를 설치함으로써 온실가스를 줄이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물품 유통에 들어가는 포장 및 운반비도 대폭 줄이는 경제적 이익을 실현했다.

SK에너지가 오는 26일 국내 제조업 중 처음으로 3000억원 규모의 ‘그린본드’를 발행하는 것도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공존한다. 친환경 사업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하는 목적으로만 발행할 수 있는 채권인 ‘그린본드’는 신재생 에너지 개발, 공해 방지 사업 등 비용으로만 쓸 수 있다.

SK에너지의 그린본드 발행 이유는 친환경 사업을 통한 환경개선과 사회공헌을 위해서다. SK에너지는 그린본드로 모은 자금을 울산 사업장인 울산CLX 내 건설 중인 감압 잔사유탈황설비(ARDS) 구축에 사용할 계획이다. 이 설비는 선박 연료에서 황 성분을 제거해 저유황유를 만드는데, 황 성분이 낮은 연료는 매연을 적게 배출한다.

SK에너지는 내년 초까지 감압 잔사유 탈황설비를 완공, 하루 4만 베럴의 저유황유를 생산할 계획이다. 매년 2000억~3000억원 규모의 수익을 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이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행보를 본격 시작한 것은 2006년 ‘행복도시락’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면서부터다. ‘행복도시락’은 결식 이웃의 공공 급식과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회사로, SK행복나눔재단을 주축으로 정부·지자체·NGO 등이 협력해 설립됐다. ‘행복도시락’은 SK 최초의 사회적 기업으로 현재까지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진행 중이다.

최 회장은 이후에도 2010년 사회적기업사업단 구성, 2012년 계열사 MRO코리아의 ‘행복나래’ 전환, 2014년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라는 저서 출간, 2015년 사회성과 인센티브 제도 본격 추진 등 사회적 가치 추구 행보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행보에 대한 시각은 회의적이었다. ‘보여주기식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오죽하면 SK 내부 반발도 심했다.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를 그룹 경영철학으로 추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임직원들의 ‘냉소주의’라고 밝힐 정도였다.

최태원 SK회장(앞줄 왼쪽 5번째)과 사회적가치연구원 구성원들이 지난 7월 30일 서울 한남동 사무실에서 이전 개원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SK

내부 공감대가 모아지고 외부의 시각이 바뀌기 시작한 때는 SK가 기업 정관에 사회적 가치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부터다. SK는 2017년 기업 정관에 ‘회사는 경제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해 사회와 더불어 성장한다’, ‘회사는 이해관계자 간 행복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도록 현재와 미래의 행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등의 내용을 추가했다. 기존처럼 주주 가치 창출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까지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SK의 핵심 경영철학은 ‘더블보텀라인(DBL) 추구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BM)’의 혁신이다. DBL(Double Bottom Line)은 회계용어인 ‘보텀라인’에서 파생된 단어로 ‘싱글보텀라인’이 재무적 성과만을 의미하는 것과 달리, 재무적 성과에 사회적 성과까지 더한 것을 의미한다.

최 회장이 DBL이라는 기념을 처음으로 내세운 것은 2016년 계열사 최고경영진(CEO) 세미나에서 였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재무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DBL이 돼야 한다”고 소개한 이후 각종 행사에서 DBL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언급했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의미하는 ‘딥 체인지(Deep Change)’ 실현을 위해 DBL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사회적 가치의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측정 시스템이 필요했다.

SK는 막연했던 사회적 가치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이를 진화·발전시키기 위해 ‘사회적 가치 측정 시스템(SPC)’을 구축했다. SK가 도입한 ‘사회적 가치 측정 시스템’은 ▲경제간접 기여성과(고용, 배당, 납세 등) ▲비즈니스 사회성과(환경, 사회, 거버넌스) ▲사회공헌 사회성과(CSR, 기부, 자원봉사 실적)의 총 3개 부문으로 나뉜다.

이를 바탕으로 측정한 SK텔레콤의 사회적 가치는 경제간접 기여성과 1조6000억원, 비즈니스 사회성과 181억원, 사회공헌 사회성과 338억원 등 총 1조6520억원으로 나타났다.

SK이노베이션은 경제간접 기여성과 2조3000억원, 비즈니스 사회성과 마이너스 1조1884억원, 사회공헌 사회성과 494억원을 각각 창출했으며, SK하이닉스는 경제간접 기여성과 9조9000억원, 비즈니스 사회성과 마이너스 4563억원, 사회공헌 사회성과 760억원을 각각 창출한 것으로 측정됐다.

SK이노베이션과 SK하이닉스 비즈니스 사회 성과가 마이너스로 측정된 것은 생산 공정에서의 온실가스 등 오염물질 배출량 때문이다. SK그룹은 앞으로도 분기 실적 컨퍼런스콜, 지속가능보고서 등을 통해 사회적 가치 측정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SK의 사회적 가치 추구는 단지 SK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 전도사’를 자처,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회적 가치 알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해 5월 26일 중국 상하이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상하이 포럼'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SK

최 회장은 올해만 해도 1월 다보스포럼, 3월 보아오포럼, 5월 상하이포럼 등 글로벌 경제 행사에서 ‘사회적 가치 설파’에 집중했다. 지난 8월에는 SK판 다보스 포럼이라 불리는 ‘SK이천포럼’에서 국내외 석학 전문가들과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지난 19일(현지시간)에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SK Night(SK의 밤)’ 행사에서 “SK는 최근 3년간 미국에 50억 달러를 투자했고 향후 3년간 1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통해 절반의 약속을 이행 중”이라며 “사회적 가치는 일자리 창출, 세금납부, 교육제공, 친환경 재료 사용 등을 통해 다양하게 창출할 수 있고, SK는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24억 달러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또 “SK의 ‘행복 날개’는 우리 모두의 더 큰 행복을 위한 헌신·약속(Commitment)을 상징한다”며 “미국 사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미 정부·기업 등과 함께 더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 파트너십을 확장하고 더 큰 행복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에도 다보스 포럼과 보아오 포럼, 닛케이 포럼 등 5차례의 글로벌 무대에서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7년에는 고용노동부가 마련한 ‘사회적 기업 국제 포럼’에 기조 연설자로 나서 ‘10만 사회적기업 양성론’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당시 최 회장은 “사회적 기업을 키우면 우리 사회가 획기적으로 행복하게 변화할 것이다. SK가 물심양면 지원에 앞장서겠다”며 10년 안에 사회적 기업 10만개를 육성하자고 제안했다.

최 회장이 도입한 사회성과인센티브(SPC) 제도 역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사회성과인센티브는 사회적기업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와 성과를 측정해 이에 따라 개별 기업에 현금 인센티브를 직접 지급하는 제도다. SK는 지난 4년간 170여개 기업에 235억원의 현금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최종현 SK 선대회장은 1995년 울산시와 울산대공원 조성을 위한 약정을 맺는 자리에서 “나는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21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경영철학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장수 TV프로그램인 ‘장학퀴즈’와 순수 장학 재단으로 45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고등교육재단이 그로부터 시작됐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장남 최태원 회장은 2014년 출간한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라는 책에서 “선친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업보국과 사회공헌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내 인생의 소명을 사회적 기업에서 찾고자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향후 최 회장이 보여줄 사회적 가치가 기대되는 이유다.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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