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창지개명으로 고유 지명 3만여개 사라져
종로 지명 특히 多
개명, 현실적 어려움…시설 이름 바꾸기부터 시작

옛 인사동의 풍경. 사진=연합뉴스

일본은 우리 국민의 이름뿐만 아니라 고유의 지명도 빼앗아갔다. 인사동, 낙원동, 신사동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 지명들은 일본에 의해 생겨났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일본에 의한 창지개명이 추진됐다. 일본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행정구역 재편의 필요성을 느껴 1914년부터 계획적으로 대한민국의 지명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본은 행정구역 폐합 및 정리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군 97개, 면 1834개, 리·동 3만4233개의 우리말 지명을 바꾸거나 없앴다. 현재 전국의 50%, 서울의 35% 그 중 종로의 50%의 지명이 바로 이 창지개명의 잔해들이다.

◆ 종로 지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본 이름

수도 행정의 중심인 종로는 특히 창지개명이 가장 많이 이뤄진 곳이다. 일본은 종로 대다수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고 그들의 통치에 편리한 이름을 붙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사동은 부근에 큰 절이 있다는 뜻의 절골, 대사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근처 지명인 관인방의 ‘인’과 대사동의 ‘사’자를 합친 인사동이 됐다.

인사동을 따라 이동하면 보이는 낙원동은 탑이 있는 동네라 해서 ‘탑골’이라 불렸지만, 일본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어의동, 한동, 원동, 탑동, 주동, 교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해 낙원동으로 변경했다.

비슷한 예로 익선동도 일본이 행정구역을 재편해서 익동과 정선방으로 나눈 뒤 앞글자를 따 만들어진 이름이다. 숭인동은 일제가 옛 숭신방과 인찬방을 각각 분해해 첫머리 글자만 떼어서 합성한 이름이며, 동숭동은 잣골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일본은 지명을 바꾸면서 본래의 뜻을 바꾸거나 격하시키기도 했다.

관수동은 본래 넓은 다리라는 의미의 ‘너더리’였다. 일본에 의해 이 고유 지명은 청계천의 흐름을 살피는 곳이라는 뜻의 ‘관수동’이 됐다.

이어 원남동의 본래 이름은 순라동이다. 종묘를 순찰하던 순라청이 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본은 이를 창경궁의 격하 표현인 ‘창경원’의 남쪽 이라는 뜻의 원남동으로 바꿨다.

종로 외에도 서울 지명의 35%에는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울의 번화가 중 하나인 신사동은 모래밭이라는 뜻의 사평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었으나, 일본에 의해 새로운 모래, 즉 식민통치로 새 시대가 열렸다는 뜻의 신사동으로 이름이 바뀐 경우다.

서울의 북한산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삼각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삼각산은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가 세 뿔처럼 우뚝 솟아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까지 삼각산으로 불렸으나, 1917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후 혼용되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 지명 바꾸기 현실적으로 어려워…시설 이름부터 우리말로

최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제 흔적 없애기’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에 국가지명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지명 개정 움직임이 있을 거란 목소리도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또 복잡한 절차, 주민들의 반발 등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름을 바꾸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지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측량·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에 의해 위원들이 임명돼야 한다. 이들이 지명변경요청을 하면, 각 지자체별로 꾸려진 지방지명위원회에서 지명변경요청의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지방지명위원회에서 승인이 나면 국가지명위원회로 넘어간다. 국가지명위원회에서 논의를 한 후 승인되면, 이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고시 하고 이후 지명 개정을 하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 지명 바꾸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2003년 서울시는, 원남동의 지명을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지명 바꾸기는 시작도 못해보고 끝이 났다. 지명은 지역 집값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미 익숙해진 이름을 바꾸는데 주민들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자리 잡은 지명을 바꾸기보다는 시설 이름을 우리나라의 옛 지명으로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은 “땅 이름은 일단 정해지면 예산이나 까다로운 절차 문제 등으로 쉽게 바꾸기가 어렵다. 따라서 지자체들도 지명을 바꾸는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광복 직후 본격적으로 지명 바꾸기를 추진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라면서 “대신 상대적으로 쉬운 역·공원·도로 등의 시설 이름에 잃어버린 고유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개명이 이뤄져야 한다. 애오개역, 버티고개역처럼 우리의 고유 지명들이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파이낸셜투데이 홍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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