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산업 선구자…‘고객안전·서비스’ 강조한 경영 방침
한진그룹 29년사, 취항지 직접 방문하는 등 자유롭고 소탈한 면모도
2010년 한진해운 사태·총수일가 갑질·사내이사 박탈 등 병환 악화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사진=대한항공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이끈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70)이 8일 폐 질환으로 별세했다.

경제계는 조양호 회장 별세에 “한국 항공·물류 산업의 선구자이자 재계의 큰 어른으로서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다”고 애도했다.

조 회장은 한진그룹 오너 2세로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정신으로 그룹을 키워낸 인물이다. 그는 45년간 항공운송·해상운송·육로운송 등 항공물류 산업을 일으켜 세계적 반열에 올렸다. 평창올림픽 유치위원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한불 최고경영자 클럽 회장 등을 역임하며 국제 교류를 증진,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데 힘 쏟았다.

특히 지난해 미국 델타항공과 조인트벤처(JV)를 체결, 미주 노선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오너일가 갑질횡포 및 비리 의혹, 사내이사 연임실패 등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발자취

1949년 3월 8일, 조 회장은 아버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하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조 회장은 1988년 인하대 대학원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 후 정비·자재·기획·IT·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에서 18년간 경영수업을 거쳤다.

1999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은 그는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올랐다. 2014년 3월 한진 칼(KAL) 대표이사에 취임, 같은 해 8월부터 2016년 5월까지 ‘2018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1월 대한항공과 한진, 정석기업, 한진칼 대표이사와 진에어, 한진정보통신, 한진관광 사내이사를 맡았다.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 이명희 씨와 결혼해 1남 2녀를 뒀다. 부인 이명희 씨는 한진그룹 공익법인인 전 일우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한진그룹 계열사인 정석기업의 이사에 올랐으나 갑질 횡포 논란으로 사퇴했다.

장녀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장남으로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차녀로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이 있다.

◆경영활동

조 회장은 우수한 항공·물류 인프라를 바탕으로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져 한국이 ‘세계 무역 규모 6위’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는 데 이바지했다고 평가받는다.

▲ ‘안전·서비스’ 강조…과감한 투자로 항공산업 비전 제시

조 회장은 안전과 서비스를 항공사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고객 중심 경영을 실천했다. 최상의 서비스 제공이야말로 최고의 항공사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특히 개개인에 대한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서비스가 더 많은 승객의 불편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 같은 조 회장의 일념 아래 대한항공은 1990년 3월 모스크바 정기 노선을 개설한 이래 시드니와 상파울루, 카이로, 베이징, 칭다오, 텐진, 선양 노선에 잇따라 취항해 5대양 6대주를 아우르는 노선망을 갖췄다.

특히 항공기 차체 소유 비중을 늘리는 그의 경영방식은 대한항공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당시 업계는 항공기를 빌려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항공기 112대 중 임차기가 고작 14대에 그칠 정도로 자체 소유 비중이 높았다.

조 회장의 이 같은 전략은 1997년 외환 위기가 국내 경제를 덮칠 때 빛을 발했다. 보유 항공기를 매각한 뒤 재임차하는 방법으로 유동성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이후 이라크 전쟁과 SARS(중동급성호흡기증후군), 9·11테러의 영향으로 항공산업이 위축되자 어김없이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다. 조 회장은 이 시기를 차세대 항공기 도입의 기회로 보고 A380, 보잉787 등의 항공기 도입을 결정했다. 이는 2006년 항공산업이 회복된 후 대한항공이 성장할 수 있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 ‘스카이팀’·‘진에어’ 설립, 항공시장 흐름 발맞춰

조양호 회장은 항공동맹체 ‘스카이팀’의 창설을 주도하고, 저비용항공사 ‘진에어’ 상장을 통해 한진그룹의 규모를 키우는 등 항공시장 변화 흐름에 발맞춘 경영방식을 보여줬다.

스카이팀 창설 당시. 사진=대한항공

2000년대 초반 조 회장은 아에로멕시코, 에어프랑스, 델타항공 등 유수의 항공사와 함께 글로벌 항공사 동맹체 ‘스카이팀(SkyTeam)’을 만들었다. 스카이팀은 마일리지 적립과 라운지 이용 등의 서비스를 공동으로 제공하며, 현재 공동운항을 통해 174개국 1150개 취항지를 연결하는 대표적 글로벌 동맹체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취임 5년 만인 2004년에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매년 발표하는 ‘항공수송통계 국제항공화물수송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19년간 1위 자리를 고수해온 독일 루프트한자항공을 제치고 2010년까지 6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조 회장은 항공업계의 흐름이 저비용항공사(서비스를 최소화해 저렴한 운임을 제공하는 것)로 향하는 것을 파악,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했다. 진에어는 대한항공과 달리 저비용 신규 수요를 창출해 대한민국 항공시장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건사고

▲ 일가족 갑질 횡포부터 사내이사직 박탈까지

“기업은 물려받는 게 아니라 자격을 갖춰서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는 경영철학을 가졌던 조 회장의 말년은 가족들의 갑질 횡포로 얼룩졌다.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을 시작으로 조 회장의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진=연합뉴스

2014년 12월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땅콩을 봉지째 가져다준 서비스를 문제 삼아 여객기를 되돌려 수석승무원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다. 해당 사건은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조 전 부사장은 대한항공 경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8년,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갑질’ 논란으로 한진가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조 전 전무는 대한항공 광고 제작을 진행하던 대행사 직원에게 욕설과 함께 물컵을 집어 던진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해당 사건으로 조 전 전무 역시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

악재는 끝이 아니었다. 같은 해 아내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폭언·욕설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이 전 이사장은 가사도우미·운전기사 등 9명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업무 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같은 총수일가의 갑질은 대한항공 직원들의 ‘조양호 일가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로 이어졌다.

조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8년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위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사기, 약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일가 소유인 면세품 중개업체를 통해 통행세를 걷어 270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여론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악화됐고 검찰과 경찰,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집중 수사를 받아야 했다.

결국 그는 3월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연임 안건이 부결되며 대한항공 이사 지위를 상실하게 됐다. 이후에도 조 회장은 “미등기임원으로서 대한항공 경영을 계속 맡겠다”고 공언했지만 지켜지지 못했다.

▲ 수난의 시작 ‘형제의 난’, 재산분할 다툼

한진가 ‘형제의 난’은 2002년 조중훈 창업주가 작고한 뒤 상속을 두고 소송전을 벌이며 발생했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조 회장이 대한항공을 승계하고 둘째 조남호와 셋째 조수호, 막내 조정호가 각각 한진중공업, 한진해운, 메리츠금융지주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3년 뒤 차남 조남호 회장과 4남 조정호 회장은 맏형인 조양호 회장이 유언장을 조작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7년간 이어진 형제의 난은 결국 봉합되지 않았다. 2016년 조남호 회장이 한진중공업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2017년 한진해운도 파산했다. 2016년 모친 김정일 여사의 빈소에서도 형제들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가

조 회장은 격식보다 실리를 추구했던 자유로운 리더로 평가받는다.

직접 사전 답사를 통해 취항지를 결정하는 일례는 유명하다. 그는 18일간 6000마일(9600km)을 손수 운전해 미국 곳곳을 살펴보기도 했다. 해외 출장도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여겨 서비스 현장을 돌아보고 안전에 저해되는 요소가 없는지 면밀하게 살폈다. 대외 행사에는 비서를 동행하지 않았다.

조 회장의 취미는 사진찍기로 알려졌다. 그가 찍은 사진 중 일부는 대한항공 광고에 사용되기도 할 정도로 취미 활동에 애정이 깊었다. 출장길에 항상 카메라를 챙겼는데, 촬영한 사진을 모아 달력을 만들거나 사진집을 출간했다. 사진 찍는 취미는 조중훈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아들 조원태 사장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고 전해진다.

한진그룹은 “조 회장은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며 “조 회장이 만들어 놓은 대한항공의 유산들은 영원히 살아 숨 쉬며 대한항공과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이낸셜투데이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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