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우리나라의 보험상품 약관은 어려운 용어와 애매한 표현이 많아서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글자가 깨알같이 작은데다 외계어 투성이로 해독 불가능이고 60~200페이지에 달해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설령 들여다 본들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해 눈이 침침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곧 포기하고 만다. 이걸 보라고 만든 것인지 보지 말라고 만든 것인지 화가 치민다.

보험약관이 어려워 보험설계사조차 약관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상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고, 보험을 잘 모르는 소비자들도 상품의 중요 내용과 유의사항을 잘 모른 채 가입해 피해를 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자살보험금, 암보험 요양병원 입원치료비, 즉시 연금 사건도 보험사들이 어렵고 불명확하게 만든 보험약관이 화근이었다. 보험사들이 소비자 배려 없이 관행적으로 그들 입맛대로 약관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소비자에게 상품 판매 시 약관의 중요내용을 반드시 설명하도록 의무화되어 있지만, 보험설계사나 소비자들은 어떤 것이 중요 내용인지 잘 모르고 어떤 방법으로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고, 들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보험업법 시행령 제42조의 2(설명 의무의 중요사항 등)에 12가지가 정해져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미흡하여 현장에서 보험설계사의 불완전판매와 소비자의 묻지마 가입이 종종 발생한다. 설령 보험설계사가 12가지를 명확히 알고 설명했더라도 소비자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도 없다.

사정이 이런데 보험사들은 소비자에게 청약서에 “보험 상품에 대해 잘 알고 가입한다”는 덧글을 쓰게 하고 얼른 사인하라고 재촉한다. 가입자는 나에게 꼭 필요한 보험인지, 가입 목적에 적합한 보험인지, 설계사가 말한 것과 약관 내용이 일치하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이 당장 덧글을 쓰고 사인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덧글과 사인은 보험사가 설명의무를 이행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방법(수작)에 불과한 것이다.

보험약관이 소비자들에게 어렵다는 지적이 반복되자 금융위원회가 보험개발원에 위임한 ‘보험약관 이해도 평가’를 2011년부터 매년 실시하고 있지만, 발표만 하고 강제성이 없어 무용지물이다. 보험사들에게 쉽게 고치라고 외쳐도 ‘소 귀에 경 읽기’이고 ‘마이동풍’이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공정경제 추진전략회의’(2019.1.23, 청와대)에서 “보험약관의 어려운 용어를 알기 쉽게 변경하라”고 주문했다. 한달 후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보험약관 개선 간담회(2019. 2.26, 보험개발원)에서 “보험약관을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할 때”라며 “소비자가 충분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약관을 만들겠다”고 밝혔고, 금융감독원도 ‘약관전문위원회’를 설치, 운영해서 어려운 보험약관을 바꿔 보겠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을 토대로 금융위, 금감원이 보험약관을 변경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7가지 사항을 제언해 본다.

첫째, 보험상품 단순화를 추진해야 한다. 약관이 쉬워지려면 상품이 먼저 단순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 단순화도 없이 약관 일부만 끄적거려 쉽게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몇 페이지 정도의 간단한 설명으로 판매할 수 없는 상품이라면 판매하지 말아야 하고 어려운 상품 약관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보험사들이 쉬운 상품, 쉬운 약관을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둘째, 애매모호한 용어나 과장된 문구, 보험사 ‘갑질’ 문구를 없애야 한다. 예를 들어 ‘공시이율’을 ‘저축보험료 공시이율’로 바꿔야 소비자가 속지 않는다. ‘직접적인 치료 목적’, ‘회사가 정한 방법에 따라’와 같은 문구는 보험사 편향 문구이므로 분쟁의 화근이 된다. 특히 “해지환급금은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 산출방법서에 따라 계산합니다.”라는 문구는 소비자를 우롱, 기만하는 문구다. 소비자는 산출방법서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인지 보지 못했고 설명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보험약관에 ‘보험금 부 지급 사례’와 ‘사업비 공제’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 현행 ‘보험금 지급사유와 보장내용’이 불명확하고 단서조항이 많아서 보험금 분쟁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험료에 사업비가 포함되어 있고, 보험금(해지환급금)은 사업비를 차감한 금액으로 적립 되며 이를 기준으로 지급한다”는 문구도 필요하다. 보험사는 사업비 공제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소비자들은 사업비가 무엇이고 얼마를 공제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넷째, 어려운 한자용어를 한글세대에 맞춰 쉽게 고치고, 전문용어, 의학용어처럼 사용이 불가피할 경우 하단에 해설(문자나 만화 등)을 추가하는 것이 좋다. 이웃나라 보험사 약관을 참조해 보자. 아울러 글자의 크기는 최소 10포인트 이상으로 기재해야 알아보기 쉽다.

다섯째, 소비자에게 실제 가입한 약관만 제공해야 한다. 보험사들이 약관 제작경비를 아끼려고 소비자가 가입하지도 않은 각종 특약 약관까지 모두 포함된 약관을 만들어 무차별로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 잘못됐다. 가입자를 헷갈리게 하고 보험과 보험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여섯째, 약관의 중요내용을 기재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가입자에게 체크하게 한 후 부본을 교부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가 약관의 중요 내용을 명확히 알고 빠짐없이 설명들을 수 있다.

일곱째, 약관을 알기 쉽게 변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험사들에게 ‘약관의 해석 원칙’을 준수 하도록 강력 조치해야 한다. 현재 “보험회사는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에는 계약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합니다. 계약자나 피보험자에게 불리하거나 부담을 주는 내용은 확대하여 해석하지 않습니다.”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많은 보험사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와 금감원이 보험약관을 얼마나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바꿀 지 두고 볼 일이지만, 행여 현장 모르는 자들끼리 TF를 구성하여 그들 입맛대로 바꾸거나 보험사 입김에 휘둘려 바꾸는 시늉만 해서는 안 된다.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은 알기 쉬운 약관이지 어렵고 복잡한 약관이 아니다. 소비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약관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금융위, 금감원이 진정 소비자 보호 의지가 있다면 생색만 낼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실제로 알기 쉽게 제대로 바꿔야 한다.

보험의 주인은 돈 내는 소비자이므로 모든 의사결정과 가치 판단의 기준은 소비자 이익(공익)이 우선이고, 머슴(보험회사와 설계사, 대리점)은 그 다음이다. 금융위와 금감원이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보험약관 변경을 추진한다면 소비자가 알기 쉬운 약관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파이낸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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