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제·리프레시 휴가제 도입, 현대적 경영체제로의 탈바꿈
인화(人和) 중시…“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사진=연합뉴스

“말을 줄이고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다”

‘침묵의 거인’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87)이 지난 3일 저녁 노환으로 별세했다. 빈소를 찾은 정·재계 인사들은 고인을 “새로운 경영방식으로 두산그룹을 건실하게 키운 지도자”라 평했다.

인화(人和)를 강조했던 박 명예회장은 두산을 ‘일생을 걸어도 후회 없는 직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룹의 최종 결정권자 임에도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아 경청의 리더라 불리기도 한다. 실무진 의견에 귀 기울이며 조직 구성원을 먼저 생각하는 경영을 통해 오늘날 ‘글로벌 두산’을 일궈냈다.

◆ 발자취

▲인화·혁신경영 통한 두산의 ‘100년 기틀’ 마련

“두산의 간판은 두산인들이다. 나는 두산에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일 뿐이다”

기업 내 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박용곤 명예회장은 일찍이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이라는 파격적 기회를 제공했다. 기업복지문화가 생소했던 1994년의 일이다. 이후 토요 격주 휴무제도와 리프레시 휴가제도를 도입해 직원들의 근무환경 개선에 힘썼다.

박 명예회장의 이 같은 시도는 ‘인화(人和)’를 중시했던 그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그는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는 슬로건 아래 기업 성장의 원동력을 사람에게서 찾았다. 특히 조직 구성원을 획일적으로 다루지 않고 개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직원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때문에 두산 직원들은 박 명예회장을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어준 분”이라 입을 모은다.

인간관계에서는 과묵한 반면 새로운 결단을 내릴 때의 박 명예회장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바꾸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일념으로 새로운 경영기법을 한발 앞서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81년 두산그룹 회장직에 오른 그는 국내 기업 최초로 연봉제를 도입해 현대적 경영체계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수립·예산편성·조사업무 등을 수행하는 ‘조사과’를 신설해 의사결정 시스템의 변화를 꾀했다.

특히 창업 100주년을 앞둔 1995년 박 명예회장은 식음료 중심의 두산그룹을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했다. 그가 대대적 개편을 단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할아버지인 고(故) 박승직 창업주의 “두산은 지속돼야 하지만, 가업(家業)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알짜 기업도 필요하면 팔 수 있다”는 선언 때문이다.

그는 당시 두산의 주력 계열사였던 OB맥주가 위기를 맞이하자 그룹 내 식음료 사업 비중을 대폭 낮췄다. 유사업종 통폐합 단행을 통해 33개에 이르던 계열사를 20개 사로, 907개의 부서를 364개로 줄였다. 그룹 성장의 핵심이던 OB맥주 영등포 공장을 서울시에 처분하고 맥주 사업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이후 인프라 지원 사업에 힘을 쏟으며 한국중공업·고려산업개발·대우종합기계를 차례로 인수해 국내 대표 중공업 그룹으로 우뚝섰다. 

▲혁신의 시작은 공장청소·맥주병 씻기부터

사진=연합뉴스

박용곤 명예회장은 1932년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친에게서 겸손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그는 “내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소박한 생활방식을 유지해왔다. 집안이 옷감을 파는 포목상을 했음에도 무명옷이 바래질 때까지 입고, 고무신이 닳아서 물이 샐 때까지 신고 다녔다.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끼니를 거르는 급우들을 위한 도시락을 들고 등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6·25 참전용사로도 잘 알려진 박 명예회장은 2014년 5월 6·25전쟁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받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본보기로 불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해군에 자원입대해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까지 북진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이다. 이는 박두병 초대회장의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봐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는 뜻에 따른 행보로 풀이된다.

한국산업은행 6기 공채로 입사해 약 3년간의 사회생활을 마친 그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두산그룹에 첫발을 디딘다. 고인의 첫 업무는 공장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신입사원부터 시작해 한양식품, 동양맥주, 두산산업 대표를 거친 그는 1981년 두산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두산창업투자·두산기술원·두산렌탈·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 설립을 통해 시대 변화에 발맞췄다. 1996년 두산그룹 명예회장으로 물러났고 2008년 중앙대학교 이사를 맡았다.

▲ ‘사부곡’으로 전하는 아내 사랑…야구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유명

박 명예회장은 고(故) 이응숙 여사와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에게 있어 부인은 ‘든든한 나의 편’이자 ‘인생의 동반자’ 였다. 유족들은 고인을 ‘아내에 대해 평생 각별한 사랑을 쏟은 남자’로 기억한다.

암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아내를 위해 병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살뜰히 간병하기도 했다. 1996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박 명예회장은 23년간 아내를 그리는 노래인 ‘사부곡(思婦曲)’을 써 내려갔다.

또한 박 명예회장은 야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쏟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연합뉴스

그는 한국 프로야구 출범 때 가장 먼저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를 창단했다. 어린이회원 모집과 2군제를 도입한 것도 두산 베어스가 처음이다. 1995년 OB베어스 한국시리즈 제패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전 시즌 기록을 줄줄이 욀 정도로 야구를 좋아해 거동이 불편해진 후에도 휠체어를 타고 전지 훈련장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두산 관계자는 “2008년 77세 희수연 당시 자녀들로부터 등번호 77번이 찍힌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받아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지었다”고 밝혔다.

◆ 사건사고

고인은 재계에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과묵한 성품으로 잘 알려져있다.

박 명예회장에게 유일한 오점으로 평가되는 것은 2005년 벌어진 ‘형제의 난’ 이다.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 갈등은 두산그룹의 치부를 드러냈다.

두산은 고(故) 박두병 회장의 유지로 시작된 ‘형제승계’의 전통을 가진 그룹이다. 그러나 2005년 차남 박용오에 의해 두산의 계열 분리 움직임이 시작되며 형제의 난이 시작됐다.

그룹 계열 분리가 형제간 ‘공동경영’의 원칙에 위배 된다고 판단한 박 명예회장은 가족회의를 통해 셋째 박용성에게 회장직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반발한 박용오 전 회장은 10여 년에 걸친 두산그룹의 비자금 횡령 사건을 고발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해당사건 이후 두산의 형제승계 전통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두산그룹의 안정적 지배구조는 승계원칙을 고수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평가한다.

파이낸셜투데이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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