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7편- 봉황대에 남아 있는 ‘황세와 여의’의 슬픈 사랑이야기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7편- 봉황대에 남아 있는 ‘황세와 여의’의 슬픈 사랑이야기
  • 김영권 기자
  • 승인 2018.10.0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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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최대 생활 유적지 봉황대,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전해져
봉황대 서쪽편에는 창고로 사용됐을 것으로 예상되는 건물유적과 선박 접안시설 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정비하면서 고대 가야의 생활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했다. 사진=김해시청
가락국 최대 생활 유적인 봉황대 서쪽편에는 창고로 사용됐을 것으로 예상되는 건물유적과 선박 접안시설 등이 발견되어 이곳이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정비하면서 고대 가야의 생활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했다. 사진=김해시청

경남 김해시 봉황동에 자리잡은 ‘봉황대(鳳凰臺)’. 김해시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쪽 회현리 패총과 연결되어 있다. 가락국 최대 생활 유적인 봉황대는 예로부터 가라대(伽羅臺), 망해대(望海臺), 여의현(如意峴), 독현(獨峴), 회현(會峴) 등으로 불려져 왔다.

봉황대가 있는 독립구릉과 주변 지역 일대의 유적은 1907~1935년 일본인 이마니시, 우메하라, 하마다 등에 의해 수차례에 걸친 발굴이 이루어져 ‘김해 회현리 패총’으로 널리 알려졌다.

1991년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사적지정구역을 제외한 봉황대 구릉 전체에 대한 시굴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김해 회현리 패총은 김해 봉황대 유적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듬해인 1992년 봉황대 진입로 개설구간 100여평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뒤 유적 전체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밝혀졌다.

봉황대 구룽의 정상부에는 환호(環濠‧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시설된 도랑)와 집자리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경사면에는 패총이 있었다. 구릉 아래 평지에도 환호와 집자리가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었다.

현재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는 평지에는 현 지표 3~4m아래에는 당시 집자라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되어 6세기까지 지속됐다.

한편 이곳에서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천년을 넘기는 세월을 두고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잊혀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황세바위.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황세바위.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지금으로부터 약 1500여년전인 금관가야 제9대 겸지왕 시절, 봉황대 아래 냄대정동에는 출정승이, 북대정동에는 황정승이 살았다.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냈으며,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까지 한다.

이후 출정승은 딸을 낳아 ‘여의(如意)’라 이름을 지었고, 황정승은 아들은 낳아 ‘세(洗)’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황정승 집안은 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출정승은 기울어진 집안에 자신의 딸을 출가시킬수 없다 여겨 황정승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혼약을 깨려 했다.

이러한 연유로 출정승의 딸 출여의는 자라는 동안 사내옷만 입었다. 출여의는 황세와 막역한 친구사이가 되어 봉황대 주위를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러나 여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세는 봉황대 정상에 있는 ‘개라암’에 올라가서 오줌멀리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다.

여의는 난처했으나, 궁리끝에 바위 뒤에 있는 삼대를 꺾어 오줌을 누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겼다. 이후 이 바위는 ‘오줌바위’ 또는 ‘황세바위’라고 불린다.

여의각.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여의각.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황세는 오줌누기 사건 이후에도 여의를 여자라고 의심했고, 어느 여름날 여의에게 봉황대 옆으로 흐르는 거북내(龜川)에서 목욕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여의는 더 이상 여자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세에게 편지를 써서 물에 띄워 보내며 사실을 고백했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의의 아버지인 출정승도 황세가 정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두 청춘 남녀의 혼약을 맺어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을 맞게 된다.

신라가 금관가야를 침범한 것이다. 황세는 전쟁터에 나가 신라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겸지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해 부마가 될 것을 명령한다.

황세는 이미 혼약한 여의를 두고 고민하다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유민공주와 혼인을 하게 된다. 여의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라는 출정승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둔다.

하늘문.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하늘문.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독서대.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독서대.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황세 또한 여의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다 마음의 병을 얻어 그해 여의를 뒤따르게 된다. 이후 사람들은 황세와 여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 뛰어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은 후 서남쪽의 것을 ‘황새바위’, 동남쪽의 것을 ‘여의바위’라고 불렀다.

유민공주는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으로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현재 김해 봉황대에는 여의낭자가 죽어서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문’이라는 돌문이 있고, 황세와 여의가 약혼한 후 처음으로 놀았다는 ‘여의좌(如意座)’, ‘망견대(望見臺)’, ‘여의목(如意木)’, ‘황세목(黃洗木)’, 소변터 등이 남아 있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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