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안 8개 소국의 반란, 금관가야의 맹주권 상실 의미

서기 209년에 일어난 이 ‘포상8국의 난’은 김수로왕 사후 금관가야가 가야 세력권에서 구심체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김수로왕릉의 모습. 사진=김해시청

3세기 초반 경상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소국이 금관가야와 신라를 침공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포상8국의 난’이라고 부른다.

포상8국(浦上八國)은 오늘날 경남 연안 지역에 있었던 8개의 소국을 가리키며, ‘8포상국’(浦上八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10대 왕인 내해왕(재위 196~230년)때 포상8국이 연합해 금관가야와 신라를 공격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조(條)에는 “내해왕 14년(209년) 가을에 포상8국이 공모해 가락을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토록 해 8국의 장병(將兵)을 격살하고, 포로 6천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 열전(列傳) 물계자(勿稽子) 조(條)에는 “물계자는 내해이사금 때 사람이다. 그때 8포상국이 공모해 가락국을 치니 가락에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해왔다. 이사금이 왕손인 내음을 시켜 부근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토록 해 8국의 병사들을 패퇴시켰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가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받아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그 3년 뒤 골포(현 창원),칠포(현 칠원), 고사포(고성) 세 나라 사람들이 길화성(현 울산)을 공격해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고, 세 나라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라고 기술했다. 포상8국은 지금의 웅천, 창원, 칠원, 함안, 진해, 고성, 사천, 곤양 등 금관가야 서방에 위치한 소국들이다.

당시 금관가야는 거등왕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신라와 화친정책을 펼쳤다. 거등왕은 신라와의 화진 정책으로 다져진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구원을 요청했으며, 신라는 이를 받아들여 가락국을 도왔다.

포상8국이 김해 금관가야에 대해 공세를 취한 원인은 현재까지 알 수 없다. 다만 전후관계로 짐작해보면 가야제국 중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를 틈타 인접 가야제국이 참여했던 사실만은 분명하다.

현재까지 국내 사학계에서는 이 포상8국의 침입을 3세기 초 해상교역과 관련해 가야 세력권 내에서 내분이 일어난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무렵 한반도 남쪽 소국들은 낙랑군을 통한 원거리 무역을 통한 선진 물자를 공급 받았다. 이 무역을 통해 권력을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가야제국 내 전쟁이 치뤄지고 있었으며, 금관가야가 가야제국이 아닌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통해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가야연맹설’이 허구일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특히 이를 통해 가야 제국의 관계가 동일한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공동운명체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다.

서기 209년에 일어난 이 ‘포상8국의 난’은 김수로왕 사후 금관가야가 가야 세력권에서 구심체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금관가야 세력권 내 분열의 주된 원인으로 분석되는 ‘포상8국의 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3세기 초반 경상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소국이 금관가야와 신라를 침공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포상8국의 난’이라고 부른다. 

일각에서는 포상(浦上)의 의미를 가라성(加羅城)으로 해석해 가라성 8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경남 해안가에 위치한 가야 8소국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포상8국의 난’은 당시 해상 세력으로 대표되는 김해 중심의 금관가야와 경주 중심의 신라(사로국), 경남 해안의 소집단 등 남부지방의 세력권의 변동 상황을 나타내는 주요한 사건인 것이다.

이와 관련 역사학계 관계자는 “포상8국이 맹주격인 김해지방을 공격한 것과 그 침입을 김해세력의 요청에 의해 경주 세력이 막아준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서 “그 결과 김해 금관가야가 경주 신라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 화친관계를 맺게 되어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사건 후 금관가야 관계사(史)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을 주목 해야 한다”며 “이 사건은 지금까지 가야 연맹설에 중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며, 신라가 낙동강 유역과 동남해안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한편 ‘포상8국의 난’ 이후 금관가야는 왜(倭)와 연결을 시도하는 등 가야국 맹주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나 5세기 초 광개토대왕이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를 초토화 시키면서 금관가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