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의 統썰] 남북 분단 70년…공동의 역사 바로 세울 때
[미니의 統썰] 남북 분단 70년…공동의 역사 바로 세울 때
  • 김민희 기자
  • 승인 2018.08.24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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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안중근 유해 발굴 작업 추진
“동양평화 염원” 안중근 정신, 남북 함께 이어가야
역사바로잡기, 민족 정체성 확립의 근간

내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공동 추진하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안중근 유해 발굴을 통해 안 의사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가는 것이 남북의 공통 과제가 된 셈이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게 된다면 서로의 마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안중근 유해 발굴 의미를 시사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후 10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 그의 유해는 수습되지 못했다. 효창공원에 마련된 가묘는 여전히 비어있고 국권 회복 이후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은 여태 지켜지지 못한 상태다.

안중근 의사. 사진=연합뉴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대 대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 일가는 일찍이 개화사상을 배우고 천주교 입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당시 백성들은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양곡을 수탈당하고 식량난에 시달렸다. 개항장에는 일본인 거주 지역이 형성되고 일본 화폐가 유통되는 등 한반도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때다.

그는 삼흥학교 등을 세우며 꾸준히 인재양성에 힘썼다.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에는 러시아로 넘어가 의병대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일본군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비밀조직 ‘단지 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를 도모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마침내 하얼빈 역에서 국적인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다. 1년 뒤 그는 32세 나이로 순국했다.

아파트로 변한 안중근 의사 묘역 추정지. 사진=연합뉴스

“중국 다롄의 뤼순(旅順) 감옥묘지(동파산 지역), 원보산 지역(2008년 3~4월 발굴지), 원보산 인근 중국 단독 발굴 지역(2009년 10월), 안중근 의사 투옥 및 사형 집행 장소인 뤼순 감옥(현재 뤼순 감옥박물관)”

해당 지역은 안중근 의사 유해가 묻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2008년 남·북은 뤼순감옥 터 북쪽 공동발굴에 나섰으나 유해를 찾는데는 실패했다. 이후 일대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현재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은 2014년 안중근 의사를 관에 넣어 매장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표 투과 레이더(GPR)’ 조사를 요청했으나 중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처럼 그동안 남·북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해 발굴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과정이 정확한 역사관·사회관을 갖고 남북한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군인 신분을 인정하지 않고 테러리스트로 정의하려 한 점도 일부 작용한다. 남북이 유해 발굴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정리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국가보훈처·외교부·통일부 등 관련 부처 실무진이 참여하는 유해발굴추진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유해 발굴 실패 과정을 되돌아보고 70년 남북 분단으로 인해 바로 서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잡을 발판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파이낸셜투데이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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