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30조 투자·19만명 채용, ‘투자보따리’ 풀었다
경제정책 원칙, 소득주도에서 혁신성장으로 이동
각종 경제 지표 빨간불…거꾸로 가는 경제 멈춰야
점수 매기기 아직 일러…조급증은 금물

사진=연합뉴스

‘앞선 정부와의 차별화.’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경제정책 방향이다. 그러나 취임 500일을 앞둔 지금 상황은 녹록치 않다. 발표되는 통계마다 아프다. 올해 2분기 취업자수 증가폭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남아 있던 2009년 4분기 이후 가장 적은 수준이다. 실업난은 더 심각하다. 2017년 실업자 수는 102만8000명으로 한 해 전 보다 1만6000명 늘어났다. 연간 집계를 시작한 2000년 이래 가장 큰 폭의 증가세다.

◆ 기업들에게 일자리 창출 및 국내 투자 당부

다행인 것은 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최근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에 무게중심을 뒀던 정부의 경제정책 원칙이 혁신성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변화가 직접적으로 감지된 것은 올 7월 무렵이다. 문 대통령은 7월 9일 인도에서 삼성전자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났다. 기업 방문을 꺼리던 문 대통령이었기에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평가받았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에게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당부했다.

청와대는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달랐다. 정부와 재계의 관계개선 신호탄 또는 하반기 경제기조 변화를 암시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한 달 뒤인 8월 6일, 김동연 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이 부회장을 만났다. 이후 100조원 이상의 투자계획이 이날 발표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투자 구걸’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김동연 부총리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8일 180조원에 달하는 삼성의 투자계획이 발표됐다.

180조원은 올해 대한 민국 예산 429조원의 42%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모든 수치와 지표 등을 압도한다. 물론 따져보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니다. 삼성그룹의 2015~2017년까지 3년간 투자 금액은 이미 150조원을 넘어섰다. 연간 60조원 정도의 투자 역시 예상할 수 있던 규모라는 분석도 나왔다. 블룸버그는 삼성전자가 지난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시설투자에만 43조원, 연구개발에 17조원 정도를 들인 만큼 삼성그룹 전체에서 연간 60조원 정도의 투자는 이전부터 충분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7월 9일 오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노이다시 삼성전자 제2공장 준공식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통큰 투자’ 릴레이, 30대 그룹 상반기 일자리 ↑

그렇다고 해도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한다. 삼성그룹의 투자 발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경제 활력의 불씨가 될 수 있고, 흔들리는 한국 경제의 중심추가 될 수도 있다. 고용유발 효과에 대한 기대도 크다. 180조원 투자에 따른 고용 유발 효과는 반도체·디스플레이 투자에 따른 40만명, 생산에 따른 30만명 등 약 7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여기에 삼성은 3년 간 4만명을 직접 채용해 청년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

재계의 ‘통 큰’ 투자는 대기업 총수들이 2017년 5월부터 시작된 문 대통령이나 김동연 부총리와의 만남을 전후로 시작됐다. 이미 밝혀진 것만 330조원,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도 19만여개에 달한다.

LG그룹은 19조원 규모의 국내 투자와 1만명 신규 채용 계획을 발표했다. 신성장동력인 전기차 부품, 자율 주행 센서, 카메라 모듈, 바이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화학 등에 투자를 진행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은 향후 5년간 신사업에 23조원을 투자하고 4만5000명을 신규 고용한다고 약속했다. 차량전동화, 로봇·인공지능(AI), 미래에너지, 스타트업 육성 등 5대 신성장 사업에 투자한다. SK그룹은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27조5000억원을 투자하는 등 향후 3년간 80조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또한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전체 인력의 30% 수준인 2만7000여명의 추가 고용도 약속했다.

한화그룹은 향후 22조원의 신규 투자와 3만5000명의 일자리 창출 등을 담은 중장기 투자 및 고용 계획을 발표했다.

신세계그룹은 3년간 9조원 투자와 매년 1만명 신규 채용에 나설 예정이다. GS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GS칼텍스는 2조6000억원 규모의 전남 여수 공장 투자 계획을 밝혔다.

지금까지 투자 계획을 밝힌 그룹은 재계 1위인 삼성을 비롯해 2위 현대차, 3위 SK, 4위 LG, 8위 한화, 11위 신세계 등이다. 5위 롯데와 6위 포스코, 7위 GS는 조만간 투자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10위 현대중공업만 구체적인 계획을 못 잡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업 구조조정과 수주 악화 지속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들이 문 정부에게 보낸 러브콜은 대규모 투자계획 발표에 그치지 않았다. 올해 상반기 30대 그룹의 일자리는 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상반기에 비해 1만4000명 이상 증가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30대 그룹 소속 계열사 가운데 반기보고서를 제출했고 전년과 비교가 가능한 262개사의 올해 6월 말 기준 전체 고용 인원은 총 96만479명이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말 94만6467명보다 1.5%(1만4012명)나 늘어난 것이다.

특히 CJ그룹의 일자리 증가폭이 가장 컸다. 계열사인 CJ프레시웨이가 간접 고용했던 급식 점포의 서빙·배식 보조 직원을 직접 고용하면서 무려 4462명(22%)나 늘었다.

이어 삼성이 3946명(2.1%), SK가 2530명(4.6%)로 뒤를 이었다.

LG(2356명·1.9%), 현대백화점(1633명·16.3%), 한화(1564명·5.6%), 롯데(1379명·2.3%) 등도 1000명 이상 일자리를 늘렸다.

정규직 숫자도 늘었다. 올해 상반기 말 현대 30대 그룹 직원 가운데 정규직은 90만4832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만8714명(2.1%) 증가했다. CJ는 정규직 숫자도 가장 많이 늘렸다. CJ의 정규직은 4365명(22.1%) 증가했다. 삼성은 4024명(2.2%) 확대했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4702명(7.8%) 줄어든 5만5647명으로 집계됐다. 비정규직 직원이 가장 많이 줄어든 곳은 GS로, 3863명에서 2451명으로 무려 36.6% 줄었다. 롯데(1110명·18.6%)와 KT(719명·19.9%)도 큰 폭으로 감축했다.

재계의 기대는 커질대로 커졌다. 정부가 산업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통 큰’ 러브콜에 ‘통 큰’ 규제 개혁으로 답해달라는 것이다.

일자리 상황판. 사진=청와대 누리집 갈무리

◆ 기업 요구 반영, 개혁 방안 정해

정부는 화답 중이다. 문 대통령의 여름 휴가 정국구상 조각 중 하나는 규제 개혁이었다. 첫 발은 ‘의료기기 구제 완화’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의료기기 산업 규제혁신 관계부처 합동 정책발표 행사에 참석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개발된 의료기기들이 규제의 벽에 가로막혀 활용되지 못한다면, 무엇보다 절실한 환자들이 사용할 수 없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이라며 “그럴 때 우리는 누구를 위한 규제이고,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생명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지원하겠다”며 “의료기기 산업의 낡은 관행과 제도,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하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인터넷 전문은행 규제 완화’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인터넷전문은행 규제혁신’ 현장방문 행사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이 국민의 큰 호응과 금융권 전체에 전에 없던 긴장과 경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금융시장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은산분리라는 대원칙을 지키면서 인터넷전문은행이 운신할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규제혁신 행보는 ‘개인정보보호 규제완화’ 추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 문 정부의 경제정책 성공여부는 반발을 어떻게 아우르느냐에 달렸다. 더 이상 갈팡질팡은 안된다. 물론, 조급증은 금물이다. 문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현 시점의 점수 매기기는 다소 이른감이 있다. 대부분은 정책은 예산투입 시기와 효과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 지금껏 그랬듯 모든 책임은 정부에게로 돌아간다. 고민만 해서는 답이 없다. 잘못한 게 있다면 인정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노동비용이 높아진 상황에서 채용을 늘려도 좋다는 신뢰를 기업들에게 줘야 한다. 문 정부의 집권은 사실상 지금부터다.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