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까지 날렸는데, 돈은 가족이…

무일푼으로 시작해 막노동, 엑스트라 등을 거쳐 중국집, 일식집, 극장 식당, 의류 도매 센터를 차리고 부동산 개발로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일궈낸 사나이가 있다. 자수성가형 기업가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이다. 그러나 안 전 회장은 속도를 줄이지 못해 자멸하고 말았다. 의류와 부동산 사업이 승승장구하자 모든 것을 유통에 쏟아부었다. 은행에서 끌어다 쓴 돈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집도 절도 모두 날렸다. 하지만 그의 근황 어디에서도 ‘망한 총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무일푼으로 대기업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가

‘조이너스’라는 여성 의류 브랜드를 기억하는가? 1994년 12월 말에 단일 브랜드 최초로 매출 1000억원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오르고 모기업이 해체되는 부침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건재한 국내 최고 수준의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를 막노동판 출신이 만들었다면 믿어지겠는가? 그 주인공은 1948년 전남 함평군 나산리 가난한 집안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이다.

“30년간 모험과 도전으로 살았다”는 안 전 회장은 1966년, 그의 나이 19세에 단돈 2700원을 들고 900원짜리 기차표를 사서 상경했다. 몸뚱아리 하나만 믿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다들 그랬든 그의 삶은 고단했다. 광주 서중을 중퇴한 그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 사진=YTN 뉴스 갈무리

그의 첫 서울 생활은 힐튼호텔 주차장 부근 막노동판에서 시작됐다.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하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차린 게 중국집 ‘왕자관’이다. 안 전 회장은 ‘싸고 맛있는 자장면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1970년에는 명동에 발을 디뎠다. 일식집 ‘해녀’를 열고 다시 열심히 살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4년 만인 1974년 4월 화마가 덮친 것. 화재로 식당 종업원 두 명이 죽고, 안 전 회장 자신도 이틀 동안 깨어나지 못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1970년대 중반 서울에는 각종 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극장 식당 열풍이 불었다. 안 전 회장은 이에 착안해 명동에 ‘무랑루즈’, 북창동에 ‘초원의 집’을 열었다. 안 전 회장은 크게 성공했다. 승부처는 마케팅이었다.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까”라는 고 이주일 씨의 유행어가 여기서 탄생했다. 안 전 회장은 당시 일기 절정이던 이 씨와 출연 계약을 맺고 홍보를 했고 TV 속에서나 볼 수 있던 이 씨를 직접 보기 위해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손에 쥔 돈으로 안 전 회장은 1980년 9월 종로5가에 의류 도매 센터인 ㈜문화데스크를 설립해 기존 의류 브랜드 재고품을 싸게 구입해서 이윤을 남기고 팔았다.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어 팔겠다는 생각으로 안 전 회장은 2년 뒤 ㈜문화데스크의 상호를 나산실업으로 변경하고 의류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년 뒤 여성 의류 브랜드 조이너스가 탄생했다. 조이너스의 타깃은 직장 여성이었다. 이를 위해 젊은 모델을 기용해 홍보했으며 전반적으로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조이너스는 매년 30%씩의 고성장을 기록했으며 1994년 12월 말에는 단일 브랜드 최초로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안 전 회장은 조이너스에 만족하지 않았다. 1989년 8월 또 하나의 히트 브랜드인 여성 캐주얼 의류 브랜드 ‘꼼빠니아’를 출시했고 1989년 5월 나산실업을 기업 공개했다. 1992년 1월에는 혼성 캐주얼 의류 브랜드 ‘메이폴’을, 1994년 1월에는 여성 캐주얼 의류 브랜드 ‘예츠’를, 그리고 1995년 8월에는 남성 정장 브랜드 ‘트루젠’을 출시했다. ㈜나산으로 상호를 변경한 것은 1996년 3월의 일이다.

나산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1991년 국세청이 발표한 100대 납세자 리스트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당시 안 전 회장은 신고소득 47억원, 납세액 23억원으로 1위에 올랐다. 40대 초반에 불과했던 안 전 회장은 재계로부터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1991년까지 안 전 회장이 운영하던 의류 브랜드는 조이너스와 꼼빠니아 단 두 개뿐이었는데 어떻게 연 소득 47억원을 올릴 수 있었을까? 그의 성공 열쇠는 보좌관이었던 문주현 MDM·한국자산신탁 회장에게 있었다. 그는 안 전 회장으로부터 오피스텔 시장 조사 지시를 받아 발로 뛰어다니며 선릉역 샹제리센타를 기획·분양했고, 이는 강남 테헤란로 인근에 오피스텔 붐이 부는 계기가 됐다. 부동산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안 전 회장은 1988년 나산관광개발을 설립하고 경기도 포천에 골프장을 개장했으며, 1990년에는 빌딩관리 업체 나산산업, 건설·인테리어 업체 나산인터내셔널, 헬스클럽 운영 업체 나산CLC를 설립하고, 1991년에는 기존 건설사를 인수해 나산종합건설을 세우는 등 부동산 개발업 영역을 확장해갔다.

땅따먹기로 모든 돈 백화점에 몰빵

그렇다면 19세에 혈혈단신 상경해 25년 만에 국내 최고의 종합소득세를 낼 정도로 번듯한 기업을 운영하던 안 전 회장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유통업에 진출하면서부터다. 나산그룹 몰락의 씨앗은 1994년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초 나산그룹은 백화점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업에 적극 뛰어들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시작은 영동백화점 인수였다. 나산그룹은 당시 부실했던 영동백화점을 150억원에 인수해 나산백화점을 설립했다. 1995년 1월에는 1996년 말 완공을 목표로 경기도 광명시에 대단위 백화점 착공에 들어갔으며 천호, 강남 등에 추가적으로 백화점을 설립했다. 같은 해 건설업체인 송산과 광주방송의 대주주인 대주건설을 사들여 언론 사업과 프로농구단 창단에까지 손을 뻗친 안 전 회장은 1996년 충남방적으로부터 한길종합금융을 인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산그룹은 그룹의 홍보, 광고, 영상, 음반, 이벤트 등을 담당하는 계열사 ‘냅스’의 인력과 경영관리실의 간접 인원을 대규모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경영진이 그룹 자금 사정의 악화를 느끼기 시작했음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안 전 회장은 자금이 생길 때마다 ‘땅따먹기’에 나섰다. 빌딩과 상가 신축이 이어졌고 1990년대 중반에는 주상복합 개발 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1997년까지 패션의류업과 종합건설업, 종합컨설팅업, 유통업, 관광레저업 등 5대 사업군에서 3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안 전 회장은 50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안 전 회장의 이러한 대책 없는 문어발식 확장은 계열사의 돈을 무리하게 끌어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 전 회장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나산종합건설을 통해서 계열사인 나산유통, 나산클레프 등에 공사 미수금 및 대여금의 형태로 2000억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회사에 불길한 기운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안 전 회장은 임의로 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다. 66억원을 횡령했고 공적 자금 가운데 290억원가량을 인출해 부동산 경락 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금융기관에 양도 담보로 제공된 시가 200억원 상당의 골프장 회원권을 자신의 부인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 무상으로 양도하기도 했다.

결국 자금난을 이기지 못한 나산그룹은 1998년 1월 최종 부도를 내고 계열사 매각 작업에 들어갔다. 주력 기업인 나산실업은 세아상역이 인수하여 인디에프로 상호를 바꿔 운영 중이다. 현재 조이너스, 꼼빠니아, 예츠, 트루젠, 메이폴 등의 브랜드가 인디에프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자기 주머니 털어 가족 주머니로

안 전 회장은 1995∼1998년 나산종합건설을 통해 상환 능력이 없는 계열사인 나산유통, 나산클레프 등에 공사 미수금 및 대여금 형태로 2359억원을 지원하게 한 배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밖에도 안 전 회장은 1994∼1998년 계열사에 대한 증자 자금 및 종합소득세 등과 개인 용도로 나산과 나산종합건설 등 회사 자금 총 256억여원을 소비해 횡령한 혐의, 2000년 법정 관리 중인 경기도 광명에 위치한 쇼핑몰 나산클레프의 자금 27억원과 화의 진행 중인 나산실업 자금 6억원을 횡령하여 부인이 대주주로 있는 ㈜부림비엠이 수서에 있는 미씨2000오피스텔의 경락 자금 등으로 사용하도록 한 혐의 등을 받았지만 2004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안 전 회장은 몰락한 듯 보였다. 보유하던 나산 지분은 모두 소각됐으며 그가 소유한 부동산인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나산스위트와 종로5가 상가건물 그리고 서울 성북동 자택까지 경매로 넘어갔다. 안 전 회장은 1997년 국제로타리클럽 3650지구 서울북악로타리클럽 회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중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소재 더리버사이드호텔 전경.

과연 그럴까? 집행유예 선고 이후인 2008년 5월 안 전 회장은 리버사이드호텔(현 더리버사이드호텔)을 경매로 인수하여 2년여의 공사를 거쳐 2010년 다시 문을 열었다. 공식 직함은 회장. 안 전 회장은 현재까지 더리버사이드호텔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2009년 5월에는 리버사이드호텔 전 소유주가 호텔 내부 공사 비용으로 약 270억원을 지출한 만큼 점포 운영권 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난투극을 벌이는 충돌이 발생해 16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2년 11월 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관광산업성과보고대회에서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국민의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안 전 회장은 2012년 2월 서울시관광협회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초청해 ‘서울관광의 도약, 소통에서 해법을 찾다’라는 주제로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한·중 양국 관광비자 조건 개선과 관광객들을 위한 축제와 행사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다.

안 전 회장은 7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서울시관광협회 관광호텔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되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에는 제21대 재경함평군향우회장에 취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안 전 회장 근황 어디에서도 ‘망한 총수’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의 장남 필호 씨가 운영 중인 포항시 북구 소재 5성급 호텔인 필로스호텔. 사진=필로스호텔 누리집 갈무리

안 전 회장은 ㈜선운의 사내이사를 맡고 있다. ㈜선운은 27홀 규모의 필로스골프클럽을 운영하는 업체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더리버사이드호텔을 운영하는 ㈜가우플랜과 경북 포항시 북구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인 필로스호텔을 운영 중인 ㈜버티비전의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가우플랜과 ㈜버티비전은 안 전 회장의 장남인 필호 씨가 이끌고 있다.

안 전 회장의 부인 박순희 씨는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기업 ㈜부림비엠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1992년 11월 설립한 ㈜부림비엠은 강남구 수서동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박 씨는 지분 86.67%를 가진 대주주다. 2017년 경영실적은 매출액 5억원, 당기순이익 59억원이었다. 이 회사는 2016년 1월 1일 공시지가 기준으로 경기 광명시 철산동에 103억원 상당의 토지와 강남구 수서동에 7억원 상당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안 전 회장의 딸 유선 씨는 2003년 7월 선운레이크CC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27홀 규모의 매머드급 골프장을 건설, 2004년 7월 신규로 개장해 운영하다가 2005년 2월 동 골프장 시설 및 관련 자산부채 전부를 포괄적으로 양도했다. 회사 양도 전 유선 씨와 함께 공동대표이사를 맡았던 조영철 씨는 1992∼2000년까지 나산CLC에 근무했고 2001년에는 나산그룹 계열사인 엔에프에스에서 근무했던 사실상 안 전 회장 측 사람이다.

<나산그룹은?>
▲1980년 문화데스크 설립
▲1982년 나산실업으로 상호 변경
▲1983년 ‘조이너스’ 브랜드 출시
▲1988년 나산관광개발 설립
▲1989년 ‘꼼빠니아’ 브랜드 출시
▲1990년 나산CLS 설립
▲1994년 영동백화점 인수
▲1995년 광명 나산클레프 건립, 대주건설 인수, 프로농구단 창단
▲1998년 1월 최종부도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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