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허황후는 해양 실크로드 ‘조개의 길’ 통해 도래했다

대성리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 사진=이뮤지엄

1990년 6월은 한국 고대사에 큰 파장이 일어난 날이다. 이날 경남 김해에 소재한 가로 208m 세로 22의 구릉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 구릉이 바로 대성리고분이다. 김해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구릉을 ‘애꼬지’ 즉 아이와 구지라는 뜻으로 불러왔다. 이 애꼬지의 실체가 드러난 날 국내 학계 뿐 만 아니라 해외 학계에서도 큰 이슈를 불러왔다. 대성리고분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이후 범국가적인 관심을 받아 3차에 걸쳐 400일 동안 조사를 실시했다. 그 조사를 통해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야국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파형동기, 동봉과 같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유물이 나와 대성리고분이 왕의 무덤임이 밝혀진다.

파형동기의 출토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학설을 뒤집어 버리는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일본 언론은 파형동기의 발견을 대대적인 뉴스로 다뤘다. 파형동기는 직경 12cm 4개의 돌귀가 바람개비처럼 휘감고 있는 독특한 형상의 청동장식품을 말하며, 방패꾸미개라고도 한다.

당시 방패에 부착된 파형동기는 녹색 회암제 돌화살촉, 활석제의 이형석 제품 등과 함께 출토됐다.

파형동기는 주로 최고 지배층의 대형무덤에서 출토되어, 이것이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파형동기는 이전까지 고대 일본왕족의 무덤에서만 100여개 출토되어 전형적인 일본의 고유유물로 알려져 있었다.

대성동 고분에서 파형동기가 발견됨으로써 일본만의 유물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의 지배계층이 곧 가야에서 건너간 계층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경남 김해 대성리 고분. 사진=김해시청

일본 오키나와 스이지가이 조개에 기원을 둔 파형

일본 요시노가리 박물관에는 600년간 존속했던 요시노가리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파형동기를 찍어내는 주형인 거푸집을 볼수 있다. 거푸집을 통해 파형동기를 찍어냈다것은 그만큼 수요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형 즉 갈고리 모양은 일본 오키나와 이남의 따뜻한 해역에서만 잡히는 스이지가이 조개에 기원이 있다는 ‘스이지가이설’에 기초를 둔다.

야오이 시대 규수지방에서는 남쪽 바다에서 잡히는 귀중한 조개를 장신구나 팬던트로 사용하는 풍습이 유행했다. 현재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이때부터 사람들이 남쪽에서 잡히는 불가사의한 조개, 특히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스이지가이 조개는 한자의 ‘水’와 닮아서 스이지가이라 불린다.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스이지가이 조개를 집안에 들어오는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개의 길’ 통해 널리 퍼진 파형

15세기 류큐왕국이 들어서면서 오키나와 통일제국이 형성됐다. 류큐왕국은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 합병되기 전까지 고유한 문화를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다. 류큐왕국은 염직물, 칠기, 악기 등 특산물을 교역한 무역왕국이었다. 류큐왕국은 해양실크로드를 통해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도 교역을 이어갔다. 이 해양실크로드가 ‘조개의 길’이다.

이 ‘조개의 길’을 통해 스이지가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파형동기의 원형이 됐으며, 이 조개문화는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3세기 중반) 규슈 호족들은 오키나와에서 나는 대형 조개로 만든 팔찌를 즐겨 사용했다. 오키나와는 이 조개를 규슈에 수출했으며 쌀, 철제품, 유리옥 등을 수입했다. 이러한 규슈와 오키나와의 교육을 총칭해 ‘조개의 길’이라 불렀다.

당시 스이지가이 조개를 방언으로 ‘모모운나’라 불렀다는 것이다. 모모운나는 ‘소 뿔을 닮은 조개’라는 의미다. 여기서 주목한 점은 소가 오키나와만의 고유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이지가이를 부적으로 삼는 풍습은 예전부터 전해온 해양문화가 오키나와에 도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 중 2층과 3층사이에서 사리 장신구가 봉납된 석함이 발견됐다. 석함에서는 특별한 물건들이 출토됐다. 봉납 당시(서기 634년 선덕여왕 3년) 최첨단 문명제품인 철제 가위·바늘·금동제 장신구와 함께 이모가이 조개가 발견됐다.

이모가이 조개는 가공된 조개껍질 형태로 말 엉덩이 부분에 부착됐다. 이 조개는 말을 타고 나가는 장수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부적’ 역할을 했다.

또한 이는 ‘조개의 길’을 통해 다양한 해양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인도 아요디아의 상카는 스이지가이 조개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는 서기 48년 7월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왔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학자들은 2000년 전 바다를 건너 금관가야에 도착한다는 것이 시간·공간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파사석탑. 사진=김해시청

또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도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고승 삼장법사 현장의 17년간(629년~645년)에 걸친 구법 행적을 정리한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아유타국은 농업이 번창하고 꽃이나 과일이 풍성한 나라라고 전해진다.

현재 그 지역 왕손들도 “허황후 전설은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지역에서는 ‘상카’라는 조개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이 허황후의 전설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다.

상카는 오키나와의 스이지가이 조개로, 아유타국이 존재했던 아요디아 지역에서는 상카라 불리며 나쁜 재앙을 막는 부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상카를 제사 및 기도할 때 분다. 아요디아 지역은 힌두교의 성지로, 거리 곳곳에 신전들이 있다.

인도에서는 ‘브라마’, ‘시버’, ‘비슈누’신이 3대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중 비슈누신은 악을 몰아내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지상에 부활한다는 미래의 신이다. 비슈누신은 한손에는 수레바퀴를, 다른 한손에는 조개(상카)를 쥐고 있다. 수레바퀴는 태양과 진리를 상징하고 조개는 인류 최초의 소리인 동시에 나쁜 기운과 악을 물리치는 천상의 나팔소리로 인지된다.

오늘날에도 힌두교인라면 살아생전 반드시 순례를 해야 하는 인도 최대 성지인 갠지스강 성지에서는 의식 시작 전 조개 나팔을 분다. 이는 지상의 나쁜 기운을 없애고 대기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다.

사진=양천허씨대종회 홈페이지

허왕후 인도 도래 설화는 사실일 가능성 높아

2004년 8월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강원 춘천시에서 열린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약 2,000년 전 가야시대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 등 남방계와 비슷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김 교수는 학회 발표에서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 등의 왕족 유골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보니 인도인의 DNA 염기서열과 가까워 이들이 남방 쪽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이 같은 결과를 얻었으며 나머지 3구의 유골을 더 연구하면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전자 분석은 인골에서 미토콘디리아 유전물질 DNA를 수집하여 전체염기서열로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로 유전되는 세포소기관으로 미토콘드리아 DNA는 가계도 조사와 진화 연구에 많이 활용된다. 한국인의 기원 연구 작업 중에 유골의 유전물질을 분석해 데이터를 낸 것은 처음이다.

또 이날 서 교수는 “유골에 있는 DNA가 문화인류학에서 규명하지 못했던 사실을 밝혀내는 유용한 연구수단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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