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줄 알았는데…“살아 있네~”

1997년 3월 21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헌정회 총회에서 (왼쪽부터)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김향수 헌정회 회장, 김수한 국회의장,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 산업의 역사는 반도체 산업과 그 궤를 같이해왔다. IT 산업 발전으로 이어진 반도체 산업은 우리나라 핵심 산업으로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기틀은 삼성전자가 마련했다. 1992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킬로바이트 D램을 개발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데 이어 256메가바이트 D램, 1기가바이트 D램을 최초로 개발했다. 그 기세로 삼성은 세계적인 전자 제품 기업으로 떠올랐고 ‘반도체=삼성’이라는 신화를 달성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시대를 앞선 판단이 오늘날의 삼성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이 있다. 이병철 창업주에게 반도체 산업을 권유한 고 김향수 아남그룹 회장이다.

삼성보다 먼저 컬러TV를 생산한 기업

‘대한민국의 전자산업’하면 떠오르는 기업은 삼성과 LG다. 삼성과 LG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대한민국 대표 그룹이다. 스마트폰, 컴퓨터, 노트북, 세탁기, 냉장고, TV, 에어컨 등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 제품 중 삼성과 LG 제품이 아닌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요즘 뜨고 있는 해외직구족들도 전자 제품에 있어서만큼은 삼성과 LG 제품을 선호한다.

이들 제품 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제품은 뭐니 뭐니 해도 TV다. 삼성과 LG의 세계 TV 시장 점유율은 합계 19.2%로 전 세계에서 팔리는 TV 열 대 중 두 대는 양사 제품이다.

우리나라에 TV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54년 7월 30일 미국 RCA사가 한국 대리점에서 20인치 화면의 TV를 전격 공개하면서다. 라디오도 생소했던 시절이라 TV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곧이어 미국과 일본에서 TV가 수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남이 주는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우리나라에서도 TV 생산이 추진됐다. 1965년 정부가 ‘부품 수입에 필요한 외화는 라디오를 수출해 번 외화를 활용한다’는 조건을 달고 금성사(현 LG)에 부품 수입을 허가하면서 TV 조립 생산이 시작됐다.

1년 뒤인 1966년 8월 금성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VD-191이라는 19인치 흑백TV를 500대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가격은 6만8000원. 쌀 27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지만 폭발적인 반응 때문에 공개 추첨으로 당첨된 사람들에게만 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일종의 ‘TV 청약’이었던 셈이다.

1970년 삼성도 일본 산요와 합작해 흑백TV를 생산했고, 1972년 독자 생산에 성공하면서 이때부터 LG-삼성 간의 TV 전쟁이 시작됐다. 흑백TV에서 밀린 삼성은 1976년 컬러TV 자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통쾌하게 복수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컬러TV 1호 생산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당시 한국 ㅂ나도체 산업의 선두주자, ‘아남산업’이었다.

2년 만에 직원 7명에서 1000명으로

아남산업은 고 김향수 명예회장이 1939년 세운 일만무역공사를 전신으로 한다. 1912년 전남 강진에서 가난한 선비 집안의 6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 명예회장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일본대학교 법과전문부를 수료한 그는 1935년 부친으로부터 장가를 권유하는 친서를 받고 귀국해 부친이 점찍어 놓은 김 명예회장의 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 동창 오승례 씨와 혼인을 올렸다.

일만무역공사를 통해 일본에서 자전거 부품, 주단, 잡화 등을 수입해 국내와 만주에 내다파는 무역업을 영위하던 김 명예회장은 해방 후 아남산업공사로 사명을 바꾸고 자전거 부품을 직접 만들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김 명예회장은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전남 강진)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기도 했지만 일평생을 한국의 산업화라는 과제를 실천하는 현장에 몸담았다. 무엇보다 김 명예회장은 1980년대 초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에게 “D램 산업은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꼭 해야하는 사업”이라고 권유하는 등 한국 반도체 산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94년 9월 5일 필리핀 말라카냥궁에서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과 만나는 김주진 아남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아남산업은 1968년 한국에서 최초로 반도체 사업에 착수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반도체라는 개념이 생소했기에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전문가들조차 김 명예회장을 만류했다. 실제로 아남산업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후 2년 가까이 수주가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70년 한국 최초로 반도체 제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해 메탈 캔 형태의 반도체를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했다. 당시 아남산업 직원은 불과 7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 달성한 수출액이 무려 21만 달러에 이른다.

이후 아남산업은 2년 만에 종업원 1000명 이상을 거느린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1973년에는 반도체개발과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금탄산업훈장을 수상했으며, 1974년과 1977년에는 각각 컬러TV와 전자손목시계를 개발·시판했다.

같은 해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아남산업은 1982년 뉴코리아전자공업을 흡수·합병하고 미국 암코사와의 합작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88년 반도체공장과 시계 종합 공장을 준공하고, 1989년 수출 10억5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1990년에는 아남인스트루먼트를 설립해 시계 사업과 반도체 정밀기계 사업, 전자 부품 사업에 진출했고, 일본 니콘사와 제휴하여 광학 사업을 시작했다.

김 명예회장은 1992년 장남인 주진 씨에게 그룹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1998년 아남산업은 그룹의 이미지를 통합해 사명을 아남반도체로 변경했다. 아남반도체는 전자기기 및 반도체 관련부품의 제조판매업, 국내외 무역업 및 무역대리점업, 시계 및 동제품 제조판매업, 전기배선기구 및 연결장치 제조판매업, 자동차료 처리장치 및 컴퓨터 프로그램 매체 제조판매업, 무선통신·방송 및 응용장치 제조판매업·부동산 임대업·통신공사업 등을 영위했으며 DSP, SRA, 3D 화상용 칩 등을 주로 생산했다. 아남그룹은 1998년 재계 21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대 흐름 읽었지만 너무 늦었다

1990년대 말 아남반도체는 반도체 조립 산업의 한계를 느끼고 고부가 제품인 비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1996년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진출을 위한 대규모 투자 직후 닥친 반도체 산업의 불황과 외환위기로 그룹이 흔들렸다. 결국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동부그룹에 넘어갔고, 아남건설, 아남시계 같은 다른 계열사들 지분도 정리됐다.

그룹의 모태인 반도체 패키징 사업부문은 아남반도체 창업 초창기부터 글로벌 마케팅과 판매를 담당해 온 미국 내 판매·영업조직인 앰코테크놀로지가 인수해 새롭게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도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로 바뀌었다. 아남그룹은 사실상 공중분해된 셈이다.

김 명예회장은 지난 2003년 6월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의 나이였다. 1992년 일선에서 물러난 김 명예회장은 한때 전직 국회의원들을 회원으로 하여 민주헌정의 유지·발전을 위한 대의제도 연구와 정책개발 및 사회복지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기업 경영과는 동떨어진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5년에는 한일 고대사의 뿌리를 밝힌 《일본은 한국이더라》를 출간하는 등 학자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 명예회장의 가족들은 그룹이 공중분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먹고 잘살고 있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너나 할 것 없이 재계에서 ‘큰손’으로 꼽힌다.

사진=한종해 기자

김 명예회장은 부인 오승례 씨 사이에서 4남 4녀를 뒀는데, 장남 주진 씨는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회장을 맡고 있다. 아남반도체의 패키징 사업 부문을 인수한 앰코테크놀로지는 현재 반도체 패키징과 테스트 시장에서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다. 미국뿐 아니라 아시아, 유럽 등 5개국에 11개 생산기지를 두고 있으며, 국내에는 서울과 부평, 광주에 공장을 가동 중이다. 월 3억5000만개 이상의 반도체를 생산하며, 2016년 1조4400억원 매출을 올렸다. 또한 최근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 지구에 10억 달러(약 1조1000억원)을 투자해 최첨단 반도체 생산기지와 글로벌 연구개발센터를 구축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지난 2000년 주진 씨를 미국 94위 부자로 꼽았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206위)보다 앞섰다. 주진 씨는 ‘2010년 미국 400대 부자 명단’에서도 308위(13억 달러 보유)에 올랐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의 후원회의 주요 일원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차남 주채 씨는 아남인스트루먼트 회장이다. 2007년 11월 아남인스트루먼트 회사분할로 설립된 아남의 대표이사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룹은 공중분해 됐지만…

김 명예회장의 외손자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이다. 바로 나성균 네오위즈 창업자다. 현재 네오위즈엔에스스튜디오 대표를 맡고 있는 윤상규 전 네오위즈 대표는 취임 직후인 2011년 3월 아남전자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당시 김 명예회장과 나 창업주 일가가 주주총회를 앞두고 지분경쟁을 벌일 것이라는 내용의 루머가 돌았다. 네오위즈가 일종의 ‘트로이 목마’격으로 윤 전 대표를 사외이사로 투입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네오위즈 측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네오위즈와 아남전자가 분쟁을 할 가능성이 없고 사업적으로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였다. 더구나 네오위즈는 상장사를 추가로 인수할 계획도 없고 윤 전 대표가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도 경영권 이슈나 사업과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아남전자는 아남그룹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2000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나 2002년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뒤 차입금 500억원을 모두 갚으면서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2007년 아남전자의 최대 주주였던 아남인스트루먼트가 사업 부문(의료기기 부품사업)과 투자 부문을 분리하고 지주회사인 ㈜아남으로 다시 출범했는데, 이때 아남전자는 아남인스트루먼트로부터 의료기기 사업을 인수했다. 2017년 12월 현재 최대주주는 아남이며 보유 지분은 20.23%다.

<아남그룹은?>

▲1956년 아남산업 설립
▲1970년 한국 최초 반도체 생산 및 수출
▲1973년 금탄산업훈장 수장
▲1974년 한국 최초 컬러 TV 생산
▲1977년 한국 최초 전자손목시계 개발·시판
▲1982년 뉴코리아 전자공업 흡수·합병
▲1988년 반도체·시계종합공장 준공
▲1990년 아남인스트루먼트 설립
▲1998년 아남반도체로 사명 변경
▲2000년 워크아웃, 그룹 공중분해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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