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3편- 일본역사의 시조가 된 금관가야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3편- 일본역사의 시조가 된 금관가야
  • 김영권 기자
  • 승인 2018.06.21 19: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역사의 시조 ‘응신’, 금관가야 패망 후 일본에서 새왕조 열어
인덕왕릉. 사진=구글어스
인덕왕릉. 사진=구글어스

금관가야는 서기 400년(경자년) 광개토 대왕의 5만 기병에게 실질적으로 패망한 후 집단 이동을 통해 일본에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일본의 건국신화인 신무동정은 김수로왕의 탄생설화와 동일하다. 천손강림마츠리는 구지봉에서 아홉명의 추장들이 춤과 노래를 불러 하늘의 천신을 점지 받는다는 내용으로 완전 일치하고 있다.

일본 역사가들은 응신 이전의 역사는 허구라고 입을 모은다. 응신이 일본 역사의 시조인 것이다.

일본 역사의 시조인 응신은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가 함락됐을 당시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민족 대이동을 한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4세기말까지 일본에는 소와 말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응신은 일본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가야인들이 일본에 소와 말을 데리고 온다.

금관가야의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 후쿠오카에 상륙한 가야의 후손 응신은 말을 타고 동쪽으로 정복활동을 시작해 오사카에 도달한다.

이후 웅신은 우사카만 평지에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다. 그가 새운 왕조가 바로 가와치왕조. 가와치 왕조는 150년간 지속되었으나 한반도 가야가 완전 멸망한 후 주도권을 백제계인 아스카로 넘겨주게 된다.

현재 일본 오사카 평온지대에는 인덕릉을 비롯 총 107개의 왕릉이 펼쳐져 있어 가와치 왕조의 번영을 알 수 있다.

인덕릉은 연인원 140만명이 동원된 세계최대 분묘다. 또 전장 486m로 일본 최대 고분이며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왕릉과 더불어 세계 3대 고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인덕릉은 앞은 사각형, 뒤는 원형 모양인 전분후원분이며 그 모양이 꼭 열쇠구멍과 같은 형태다.

인덕릉은 거대한 언덕같은 고분을 3중으로 판 해자(垓字)가 둘러싸고 있다. 그 고분에서는 가야식 토기인 스에키가 발견됐는데, 스에키는 5세기경 한반도에서 전래된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다.

스에키의 뜻은 우리말로 ‘쇠’라는 의미와 ‘마치 철같이 단단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철과 같이 단단하고 검은토기를 ‘스에키’라고 명명했다.

가야토기. 장인마다 만드는데 편차가 있었겠지만 사진속 형태의 토기는 대부분의 가야 문화권에서 발견되었고 가야를 통해 토기, 가마기술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토기 또한 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있다. 사진=나무위키
가야토기. 장인마다 만드는데 편차가 있었겠지만 사진속 형태의 토기는 대부분의 가야 문화권에서 발견되었고 가야를 통해 토기, 가마기술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토기 또한 이와 흡사한 모양을 하고있다. 사진=나무위키

스에키의 발견은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가야왕족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패망한 금관가야 왕족들이 일본으로 도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일본은 국경 없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따라서 금관가야 왕족들이 일본으로 도래한 후 정착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일본은 국가 형태를 갖추지 해 금관가야인들이 도래해 일본의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과 같은 외교적·정치적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역사에서는 일본으로 도래한 금관가야인들이 모여 살던 곳을 하제(土師)마을 이라고 불렀다. 현재 하제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유물이 발견된 후 유적지를 메우고 바로 그 자리에 하제소학교를 세웠다.

일본의 도명사 천만궁에는 ‘하제유적’(하제의 가마터)이 있으며, 그 도명사 입구 석비에는 ‘노미스크네’라는 인물이 세겨져 있다.

노미스크네는 하제씨들의 시조로, 순장대신 무덤 주위에 진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토용을 넣자고 제안한 공으로 일왕으로부터 이곳의 성과 봉토를 하사받았다.

도명사 천만궁의 원래 기능은 하제씨의 시조인 노미스크네를 모시던 신당이었다. 그는 5세기 초 금관가야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의 수장이었던 것이다.

천만궁 보물창고에 가면 ‘스가와라 미치자네’(845~903)라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59세 일기로 사망한 일본 최고의 학신으로 ‘화혼한재’(和魂漢才,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지만 일본의 혼을 통해 일본화 해야 한다는 의미)의 인간이라고 불릴만큼 한학의 대가이자 뛰어난 사상가였다.

현재까지도 천만궁은 스가와라라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일본 입시철 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찾아와 합격을 기원하는 곳이다.

그곳 보물창고에서는 스가와라가 사용한 빗과 거울 등 개인 소지품을 볼수 있는데 이를 통해 스가와라가 하제출신, 즉 금관가야 출신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가와라는 하제마을에서 자라 학문을 익힌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도명사 천만궁에는 스모장이 있다. 스모는 일본의 국기로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통 스포츠다. 원래 스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을 모시는 의례다.

흥미로운 사실은 금관가야의 후예로 알려진 노미스쿠네가 일본 최초 스모를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이마노케하야라는 아주 힘이 센 장사가 있었는데 노미스쿠네아 힘겨루기를 했다고 한다. 이 대결에서 노미스쿠네가 오늘날 스모와 같은 기술로 상대를 이겨 부근 영지를 부상으로 받게 되었고, 이후 하제씨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가와라와 더불어 노미스크네는 문무를 겸비한 금관가야인의 적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관가야왕족의 후예인 노미스크네가 일본 최초 스모를 한 인물이라고 하면, 일본의 국기인 스모 원형에 금관가야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제마을에도 거대한 고분이 있다. 이는 인덕왕의 아버지인 응신왕의 무덤으로, 일본 고대사7대 불가사의중 하나다.

응신릉은 쌓아놓은 흙의 양만으로 보면 시계최대 분묘인 인덕릉을 능가한다. 당시 이처럼 거대한 인공릉을 축조할 수 있었던 것은 비결은 무엇일까?

도명사 천만궁에는 돌처럼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사용한 ‘슈라’(수레)가 있다. 하제씨 본거지에서 발견된 이 슈라를 이용해 거대한 고분을 인공적으로 성토하고 석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세기 백만명이 넘는 현지인들을 동원해 불가사의한 왕릉을 축조할 수 있었던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은 금관가야인들이었다.

파이낸셜투데 김영권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